*이 리뷰에는 캔 로치의 영화 <지미스 홀>의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캔 로치의 신작을 챙겨보실 의향이 있으면서 스포일러를 결코 원치 않으시는 분은 이 시점에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시길 바랍니다. 매체와 필자는 경고문을 건너뛴 독자의 비탄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 영화 '지미스홀'의 메인 포스터

고백하자면 처음 <지미스 홀>을 보고 그다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작인 <엔젤스 셰어>보다 못하네”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박권일 선생이 ‘코뮤니즘’이라는 단어를 페이스북에서 쓴 것을 보고 영화를 다시 보기로 했다. 그렇게 이틀 후 두 번째 영화를 본 뒤, 감히 불경하게도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평가질’하려 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지미스 홀>은 <엔젤스 셰어>보다 못한 영화가 아니라, <엔젤스 셰어>와 다른 영화다. 영화의 결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진행되는 장면과 장면, 그 ‘과정’들이 중요하다. 두 번째로 보고서야 비로소 켄 로치 일당이 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에 가 닿았다. 마을회관을 구심점으로, 구성원들 모두가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배분하는” 코뮨을 건설하고자 했던 노력, 그 안에서 웃고 춤추고 노래하며 삶의 축배를 들고자 했던,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며 서로를 북돋고 다름을 인정하며 보완해 가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 다만 내가 이 영화에 온전히 몸을 맡길 수 없었던 것은 이 영화의 아름다움이 덜해서가 아니라, 주요 무대가 되는 30년대 아일랜드의 정치적 환경이 한국의 근현대사와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의 등장을 뉴스로 접하며 이른바 ‘멘붕’에 빠졌던 게 불과 며칠 전이다.

말하자면 <지미스 홀>은 켄 로치의 2006년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10년 후쯤의 이야기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IRA가 영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치르는 과정뿐 아니라, 영국의 정전 협정을 수용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 사이의 내전까지 다루었다. 내전을 치르며 아일랜드인들이 거쳤던 동족상잔의 비극은 <보리밭의 흔드는 바람>의 마지막 씬에서 절정을 이룬다.
▲ 영화 '지미스홀'의 한 장면
그리고 <지미스 홀>은 그 상처가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에서 시작한다. 영국령 아래 그나마 자치정부와 자치법정을 세울 수 있다며 유지들과 타협하며 협정을 수용했던 이들과, 온전한 (사회주의) 독립국가를 꿈꾸었던 반대파들의 내전, 그로 인해 계속 불씨를 안고 있었던 갈등은 <지미스 홀>에서도 계속되고 심지어 격화된다. 다만 켄 로치 감독은 실존인물인 지미 그랄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 영화를 내전과 동족상잔의 직접적인 역사물로 만드는 대신, 그와 동지들이 작은 시골마을 리트림에서 꿈꾸고 시도했던 이상과 코뮨을 구체적으로 그려나간다. ‘피어스-코널리 홀’이란 이름을 가진 이 마을회관은 지미 그랄튼의 땅에 그가 번 돈을 들여 지어졌으나 지미 그랄튼 개인 소유의 건물이 아니다. 마을회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모두의 노동으로 지어진, 마을사람 모두의 공공의 공간이다. 이는 영화 속 대사로도 직설법으로 강조된다.
그런데 이 마을회관은 어쩌다 ‘피어스-코널리 홀’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일까. 수배령을 피해 미국 뉴욕에 있다가 대공황 직후,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정권이 바뀌면서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지미는 폐허가 된 마을회관에 들어가 먼지가 가득 앉은 책을 들춘다. ‘아일랜드 노동사(Labour in Ireland)’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의 저자가 바로 제임스 코널리다. 그의 이름은, “마을회관을 재건해 달라”던 아이들의 요청에 지미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지미를 비난하는 대목에서도 다시 한 번 나온다. “제임스 코널리가 지하에서 통곡하겠어요!”
아일랜드의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창립자 중 한 사람, 아일랜드 좌파의 영원한 영웅이며 사회주의자였던 코널리는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주모자 중 한 사람으로 총살당했다. 사실 제임스 코널리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다. 주인공 일당이 영국군에 잡혀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할 때, 주인공 데미언(킬리언 머피)은 동료와 코널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의 그 유명한 연설 문구를 인용한다.
▲ 영화 '지미스홀'의 한 장면
“우리가 내일 당장 영국군을 쫓아내고 더블린 성에 녹색기를 꽂는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설하지 않는다면 헛된 노력이 될 것이다. 영국은 여전히 자본가들과 지주, 금융가, 그리고 이 나라에 그들이 이식해 놓고 우리 어머니들의 눈물과 순교자들의 피로 키워온 상업적, 개인적인 제도를 통해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If you remove the English army tomorrow and hoist the green flag over Dublin Castle, unless you set about the organization of the Socialist Republic your efforts would be in vain. England would still rule you. She would rule you through her capitalists, through her landlords, through her financiers, through the whole array of commercial and individualist institutions she has planted in this country and watered with the tears of our mothers and the blood of our martyrs.)”
반면 피어스의 경우 영화를 통틀어 풀 네임이 언급되는 적이 없다(어쩌면 자막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구글링을 통해 피어스가 역시 코널리처럼 부활절 봉기의 주모자 중 한 사람이자 봉기 때 처형당한 패트릭 헨리 피어스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헌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열렬한 민족주의자였을 뿐 아니라 매우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는 사실이다. 여러 모로 제임스 코널리와 대비되는 인물인 셈이지만, 마을회관을 만든 이들은 홀에 그의 이름을 또렷이 새겨 넣었고, 그럼으로써 서로 태어난 배경과 성품, 입장도 모두 달랐으되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 둘을 모두 기렸다.
헌데, 영화를 본 이들은 알겠지만 지미와 동지들, 그리고 춤을 추고자 하는 마을 젊은이들의 이 아름답고 이상적인 코뮨을 가장 적대하고 위협하는 세력에는 영국 자치령을 수용한 파시스트들뿐 아니라 카톨릭이 있다. 교구의 노사제 셰리단은 ‘신성한 카톨릭의 독점적 권한’인 ‘교육’이 이 마을회관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반대하며, 지미 그랄튼에 거의 ‘집착’하듯 그를 악마시한다. “이 마을에 빨갱이를 들일 수 없고, 그는 신념 있는 빨갱이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미가 미국에서 배워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스윙댄스의 일종인 심샘(Shim Sham) 역시 우아하고 고상한 아일랜드 전통춤과 달리 쾌락을 좇는 타락한 춤이라며 비난한다. (그런데 이런 비난과 증오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셰리단은 영화에서 여러 차례 가족과 가족, 이웃과 이웃이 서로 피 흘리며 싸웠던 역사를 끝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미와 동료들이 세운 마을회관의 이름이야말로 그러한 화합을 염원하고 소망하고 있지 않은가? 지미의 마을회관에서는 심샘뿐 아니라 아일랜드 전통 춤과 음악 역시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 영화 '지미스홀'의 한 장면
홀에서 벌어진 토요일 밤의 흥겨운 무도회와, 다음 날 미사에서 셰리단 신부가 하는 설교가 계속 교차 편집되는 씬은 이 영화의 여러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다. 웃음과 행복과 사랑, 웃음과 춤이 넘쳐나는 홀의 모습과 증오와 엄숙함, 비난으로 가득한 설교 시간의 대조는, 셰리단 신부가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호명하는 데에서 정점을 찍는다. ‘명단 공개’, 이 역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행태이다.
몇몇 젊은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게 일견 철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러한 키득거리는 반응이야말로 이 행태에 가장 적절하고도 어울리는 반응이기도 하다. 마을 어귀를 지키고 앉아 무도회로 향하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놨다가 미사 시간에 공개적으로 부른다는 행위는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매우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자비한 채찍질, 그리고 아이들과 여자들이 춤추고 연주하는 마을회관으로 퍼부어진 총알로 돌아온다. 마을회관을 좋아했던 아이들은 그저 “우리 제발 춤추게 해 주세요”라는 간절하고도 단순한 희망이 있었을 뿐이다. 이 소박한 한 마디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정치성을 가지는지, 이 영화처럼 잘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 영화 '지미스홀'의 한 장면
“이제 그만 싸움을 끝내고 화합해야 할 때”라는 셰리단 신부의 말은, 지미 그랄튼의 극 중 연설대로 서로 계급이 다른 이들의 이해를 감추고 도리어 어느 한쪽의 희생과 침묵을 강요한다. 지주와 소작인의 이해가 같을 수 있는가? 사장과 노동자의 이해가 같을 수 있을까? 통합과 화합은 셰리단과 영국령 찬성론자들처럼, 혹은 민족주의자들처럼 “우리는 하나이니 화합해야 한다”는 구호에서 출발해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을회관의 이름이 드러내는 것처럼, 그리고 지미의 연설이 강조하는 것처럼, “서로의 다름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그 간격을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비로소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아일랜드 역사상 유일하게 ‘불법 이민자’로 추방 당한 사람으로서 지미 그랄튼, 타지에서 죽음을 맞았고 그 유해조차 고국의 반대자들로 인해 돌아오지 못한 지미 그랄튼, 동지이자 오랜 시간 마음에 품고 사랑했던 단 한 명의 여인에게 빈 마을회관에서 함께 추는 춤으로, 그리고 “널 보면 숨이 멎는 것 같아”라는 뜨거운 고백으로밖에 사랑을 표현할 수 없는 지미 그랄튼(이 장면의 숨막히는 아름다움과 애절함은 굳이 말을 더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지미 그랄튼 개인의 비극과 슬픔이 아니라, 지미와 그 동료들이 만들고 경험했던, 배우고 익히고 나누었던, 씨앗을 뿌리고 가꾸었던 코뮨과 코뮤니즘 때문에 빛나는 영화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떨리게 하고, 웃고 눈물 흘리게 하며 흥분시키며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씨앗이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울 것을, 또한 열매를 맺고 다시 씨가 뿌려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건 마을회관을 불태운다고, 지도자 한 사람을 추방한다고 지워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을회관이 불탔대도 네가 배운 것은 모두 네 안에 있어”라던 대사 그대로 말이다.
▲ 영화 '지미스홀'의 한 장면
그렇기에 지미가 추방되는 그 와중에도 그들은 마치 내일 다시 만날 사람들처럼 웃으며 그를 배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자식에게, 또 손자에게 “지미 그랄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야…”라며 자신들의 경험과 마을회관의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또 전해줄 것이다. 그렇게 아일랜드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에게도 ‘영화’라는 형태를 통해 전해진 것이 바로 <지미스 홀>이다. 우리와 꼭 닮은 역사를 가진 저 먼 나라의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며 우리가 슬픔과 냉소와 좌절 대신, 희망과 투지를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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