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프랑켄슈타인의 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영화에 이어 올 하반기에는 연극<프랑켄슈타인>이 선을 보였다. 마치 2012년 영화와 뮤지컬로 쌍끌이 흥행을 보여준 <레미제라블>의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반복되는 듯하다.

예술의전당과 연극열전이 손을 잡고 제작한 야심작 <프랑켄슈타인>은 창작물은 아니다. 드라마 <셜록>의 주인공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출연한 해외 작품(우리나라에서는 <NT Live 프랑켄슈타인>으로 관람할 수 있다)을 들여와서 무대 위에 올렸다. 하지만 영국 원작을 고스란히 답습한 레플리카 방식의 연극이 아니다. 일정 부분 각색한 ‘논 레플리카’ 공연이다.

▲ 연극 '프랑켄슈타인' ⓒ연극열전
연극은 괴물의 탄생 과정을 묘사하지 않는다. 시체를 이어붙이는 괴물의 창조 과정, 혹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고자 하는 창조의 동기는 생략된다. 그렇다고 해서 극의 이음새가 헐겁지는 않다. 괴물이 만들어진 과정은 생략하지만 괴물이 어떻게 자아를 갖고, 인간성을 찾아가고, 인간의 지식을 갈구하는가 하는 괴물의 성장 과정에 공을 들인지라 ‘강조와 생략’의 이음새가 껄끄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괴물에게 관객이 반감이 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괴물의 성장에 방점을 두고 섬세하게 직조된 연출 덕이다.

천둥벌거숭이로 태어난 괴물(박해수 분)이 인간이 짝을 짓고 보금자리에서 살아가는 걸 동경한다는 건 인간의 사고를 학습한 학습 결과일까, 아니면 리처드 도킨슨이 표명한 것처럼 ‘인간은 유전자의 종’이라는 종족 번식의 본능을 물려받은 결과일까. 괴물이 자신과 닮은 피조물을 빅터 프랑켄슈타인(이율 분)에게 요청하는 건 드 라쎄(정영주 분)로부터 학습 받은 학습의 결과인가, 아니면 인간의 육신으로 만들어진 육체인지라 종족을 계승하라는 인간 유전자의 본능에서 비켜가지 못한 괴물의 숙명인가를 되묻게 만든다.

하지만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짝을 만들어달라는 괴물의 요청에 달가워하지 않는 건, 괴물과 같은 변종이 퍼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영화 <엑스맨> 시리즈에서 인간이 돌연변이들을 통제하고 개체가 늘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지구상에서 인간이 최상위 개체가 되기를 바라는 인간 우월주의적인 심리를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연극 '프랑켄슈타인' ⓒ연극열전
앞서 언급한 영국 원작과 두드러진 차이점은 아마도 결말 부분일 듯하다. 영국 원작의 결말은 메리 셸리의 결말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원작의 변용이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국에서 선보이는 <프랑켄슈타인>은 고유한 변용을 시도한다. 영국 원작과는 결말이 확연히 다르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보는 것과 같은 연극의 결말은 창작 각색의 저력이 무엇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일 년에 백 편 이상의 공연을 관람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올해 관람한 공연 중 가장 참신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레플리카의 수순을 넘어선, 논 레플리카 공연의 개가로 평가할 만한 공연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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