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 대통령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었다. 설왕설래가 많았지만, 선의로 이해할 지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의 변화와 자신이 추동하고 있는 개혁의 성과를 말하며, 그는 특유의 비유를 쓴 것이었을 테다. 국가의 ‘권력질’로 더 이상 기업을 줄 세우지 않으니, 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당당히 경쟁하라는 메시지도 있었다.

물론, 의심했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러한가? 그 정부를 구성했던 핵심 그룹인 386의 의지가 삼성 앞에만 서면 작아진다는 얘기가 공공연할 때였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 말이 “권력은 삼성으로 넘어갔다”는 것 아니냐고 자조하곤 했다. 우연찮게 그 무렵은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가 국가 경제의 골간이 되고, 삼성의 성과로 국가의 경쟁력을 논하기 시작했던 무렵이었다.

카카오톡 검열 논란이 뜨겁다 못해 데일 지경이다. 개별 기업을 두고 이렇게 온 사회가 떠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그나마 굴뚝 기업도 아니고, 국가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업도 아닌데 말이다. 모든 걸 떠나,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를 더듬다 문득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그 말이 떠올랐다. 그는 틀렸다. 권력은 여전히 권력자에게 있다.

카카오톡 검열 논란은 2가지 층위로 나눌 수 있다. 국가 기관에 의한 ‘검열’ 이슈와 IT기업의 ‘보안’이슈가 겹쳐있다. 이 둘은 앞뒤를 구분하기 힘들게 맞닿아 있는 것이 맞지만, 앞과 뒤가 영원히 마주치지 않는 것처럼 또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하다. 질문을 추려보자. ‘카카오톡을 향한 분노는 정당한 것인가?’

복잡한 대답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카카오톡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세세하게 이용자들의 정보를 국가 기관에 넘겨왔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더 천하의 나쁜 기업일까. 이런 가정을 해보자. 경찰이 범죄자를 잡겠다고 협조를 구하는데, 극악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그 놈’의 메시지가 꼭 필요하다고 했을 때, 카카오톡 측은 어떻게 했을까? 거절했는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공조했는지 현재로썬 전혀 알 수 없다.

그런데 만약 범인을 잡았다면, 잡는데 카카오톡의 협조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면, 그 때도 우리는 지금만큼 분노하고 있었을까? IT기술의 발전으로 보다 안전한 사회에서 살 수 있게되었다는 안도를 하진 않았을까. 이런 가정을 해보는 이유는 이 사건에 어떤 왜곡이 맺혀 있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기업의 보안으로 문제를 축소시켰을 때의 우리의 반응성을 생각해보잔 것이다.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개인정보유출 문제 등에 있어 그동안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더 강한 통제력을 기업에 요구해왔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그렇지 않았었다고 해서 이번에도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사건을 구성하는 양립항 가운데 놓치는 부분이 없어야 한단 말을 하고자 함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카카오톡이 그간에 어떤 협조와 공조를 해왔는지 스스로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건, 카카오톡의 보안 수위를 점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기관의 검열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카카오톡은 이 대목에서 몇 번 말을 바꿨고, 축소지향적으로 문제를 봉합하려는 태도를 자꾸 보이고 있는데 이 대목이야 말로 카카오톡 측이 지금 가장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국가 기관의 ‘검열’에 맞춰져야 한다. 카카오톡이 ‘자본의 불복종 운동이냐’는 빈정거림을 견디면서까지 ‘사과’ 입장을 밝힌 이상 이제 정말 더 중요한 문제로 저항을 이어가야 한다. ‘압수수색에는 협조하겠다는 것이냐’고 카카오톡에 물어봐야 소용없다. 기술적으로 아예 그것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단 주장도 정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행 법체계에서 무용하다. 그 조차를 도저히 못 믿겠다면, 그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을 이용자의 권리는 지금도 그리고 언제나 존재한다.

권력이 권력자에게 있고, 그 권력자가 기업에 권력질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상황이 제어되지 않는 한, 카카오톡의 문제는 언제고 계속될 수밖에 없다. 카카오톡의 기술적 설계가 텔레그램처럼 된다고 해서 근본적인 해결이 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카카오톡이 삼성전자처럼 국제적 위상의 독보적 존재가 되어 감히 국지적 차원에서 권력자가 얕잡아 보기 힘들 수준이 아니라면 카카오톡의 문제는 거의 모든 기업이 지니고 있는 취약성, 그 자체로 한국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다.

이 부분을 짚지 않은 채, 카카오톡을 가히 ‘권력의 앞잡이’로 묘사하다가 갑자기 ‘반체제 기업’으로 전환시키려는 언론의 보도는 그래서 문제적이다. 카카오톡의 대응이 문제를 키운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 문제의 8할은 대부분의 언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언제라도 개개인의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여기는 국가 기관의 그릇된 의지와 월권에 있다. 그 의지와 월권을 ‘영장’이라는 제도로 제한한들, 압수수색이란 형식으로 수렴한들 권력자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문제가 반복되리란 걸 이 기회에 분명히 각인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상황에서 제 아무리 텔레그램으로 망명을 하더라도, 분이 풀릴 때까지 카카오톡을 더 패더라도 이 부조리한 상황은 끝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봐선 곤란한 당신의 은밀한 개인정보는 카카오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별 기업의 서버 어디에도 널려있고, 심지어 생각도 못했던 네비게이션에도 저장되어 있다.

카카오톡 검열사태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한 시민은 “카카오톡은 정권의 앞잡이다”고까지 말했다. 그 격앙은 너무 강고해보였다. 왜 카카오톡이 그렇게 됐는지 그 배경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미래부의 어떤 고위 관계자는 사석에서 “카카오톡 같은 기업은 이번에 망해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시민적 권리 침해에 이렇게 모두가 대동단결에 분개하고, 저항하는 상황이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이번에도 타깃을 잘 못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는 이유다.

카카오톡은 정권의 앞잡이가 아니라 권력의 그릇된 욕망에 굴복한 비겁자일 뿐이다. 정체가 탄로난 비겁자는 두려울게 없고, 위험성이 상당하지도 않다. 비겁자를 욕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문제는 전도유망한 자생적 IT기업이 왜 그런 비겁자가 될 수밖에 없는지 하는 점이다. 더 적나라하게는 누가 그들을 비겁자로 만들었는가이다. 혹시, 우리는 지금 왕궁의 저 음탕함 대신에 설렁탕집 주인에게만 분개하고 옹졸하게 그렇게 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시장을 비난하는 무리의 삿대질을 다만, 권력은 이번에도 안도하며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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