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 ‘인정 욕구’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이라면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가까운 사람, 특히 가족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 특히 부모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자란 자녀에겐 부모로부터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정 욕구가 마음 한편에 자리잡게 된다.
가령, 학교에서 백 점의 점수를 받아 부모에게 잘했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청소년이 있다고 치자. 만일 자녀가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점수를 바라는 기대치가 높은 부모를 가졌다면 그 청소년은 부모에게 잘했다고 인정받기는커녕 왜 전교 등수는 이것밖에 받지 못했느냐고 핀잔 받을 가능성이 높다. 노력은 하지만 부모의 높은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 탓에 자녀는 커서도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버지 노먼은 이런 딸의 인정 욕구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탓에 결혼을 눈앞에 둔 딸과의 관계는 살얼음판이 따로 없다. 아버지로부터 딸의 정체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한 채, 딸의 인정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만 확인한다. 그리고는 아버지 노먼과의 화해는 수면 위로 꺼내지 못하고 냉랭하게만 지낸다. 아버지 노먼은 딸과의 소원한 관계를 알고는 있지만 딸과의 보다 나은 관계를 위한 노력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딸과 아버지의 갈등의 골이 깊은 만큼 연출은 아버지와 딸의 갈등이 관객에게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고민했어야 옳다. 하지만 연출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첼시라는 캐릭터에 대한 인정 욕구의 화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해 보였다. 아버지와 딸의 날선 각은 있지만 부녀의 화해에 대한 진지한 고민 대신에 부녀간의 갈등은 봄볕에 눈 녹듯 은근슬쩍 처리하는 연출을 보여준다. 산이 깊으면 골이 깊은 만큼, 몇 십 년 동안 쌓여온 부녀의 갈등 혹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던 딸 첼시의 인정욕구의 해결이 새털같이 가벼운 건 전적으로 설익은 연출 때문이지 중견 배우들 탓은 아닌 듯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