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친구 릴리(다코타 패닝 분)와 제리(엘리자베스 올슨 분)에게 문제가 있다면 한 남자와 동시에 사랑에 빠졌다는 점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삼각관계 이야기라는 것인데, 삼각관계의 문제는 두 이성에게 동시에 사랑을 받는 한 이성은 둘 중 하나에게만 사랑의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릴리와 제리의 우정이 삐그덕대는 상태에 빠지는 것도 알고 보면 한 남자에게 모두 사랑을 받을 수 없어서다. 두 여성이 좋아하는 한 남자가 폴리가미의 가치관을 가지지 않은 이상, 아니 릴리와 제리가 두 남자에게 한꺼번에 사랑을 받는다 해도 둘 중 하나가 다른 친구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아야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모노가미의 동물이고, 질투를 느끼는 동물이기에 좋아하는 이성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를 좋아한다고 할 때 사단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베리 굿 걸>은 우정보다 사랑이 우선시할 때, 아니 사랑이 우정을 배신할 때의 아픔을 잔잔한 영상 가운데서 보여준다. 두 여자가 동시에 사랑하는 이성을 내가 사랑한다고 친구에게 밝힐 수 없을 때, 아니 이성을 사랑하는 친구의 마음에 대못을 박지 않기 위해 친구 몰래 다른 이성과 사귀는 것이 짝사랑하는 친구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는 걸 영화는 짚고 넘어간다.

하지만 <베리 굿 걸>에서 친구 몰래 사랑을 나누는 사랑이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이들 여주인공들이 청소년기와 성인을 관통하는 ‘낀 세대’, 성장 과정에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만일 한 남성을 동시에 사랑하는 릴리와 제리의 나이대가 <섹스 앤 더 시티>의 30~40대 여성이라면 차마 밝히지 못하고 몰래 사랑을 나누는 친구의 다른 친구를 위한 배려, 그러니까 다른 친구에게 이 남자와 사랑하지 않는 척하는 속임수가 정당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릴리와 제리는 지금 막 대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인 나이대다. 우리나라 나이로 치면 고3을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청소년기와 성인기의 중간 단계에 갓 접어든 과도기라는 이야기다. 과도기에 하는 행동이 용서받을 수 있고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은 이들의 나이대엔 사랑에 서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되레 과도기에 성숙한 행동이나 결정을 할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이 나이는 사랑을 결정하는 방식이나 우정의 방식이 서툴러도 이해받을 만한 나이, 관용을 받을 만한 나이대다. 미성숙한 나이대에 친구를 위해 사랑을 속이는 것이 가증스럽거나 영악해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큰 사랑, 성숙한 우정의 가교를 쌓기 위한 성장통으로 바라보는 관용을 품을 수 있는 건 ‘우리 역시 이 나이대에는 이랬지, 아니 더하면 더했지’하는 과거의 상념으로 영화를 관조할 수 있는 회고의 정신이다.

다시금 언급하는 것이지만 <베리 굿 걸> 속 제리와 릴리의 나이대가 <섹스 앤 더 시티> 여주인공들의 나이대였다면 훈훈하게 웃기보다는 눈살을 찌푸렸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제리와 릴리의 나이대는 성년을 위한 성장통의 시기이자, 아프면서 성숙해지는 과도기이기에 우정을 속이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친구에게 밝히지 못하는 사연을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