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거니 뒤서거니 지상파 3사의 수목 드라마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9월 10일 시작한 KBS2의 <아이언맨>, MBC <내 생애 봄날>에 이어, 9월 17일 시작된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등 세 편의 작품이 그것이다. 그런데 전혀 다른 듯한 이 세 편의 드라마는 꼼꼼히 뜯어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우선, 이 세 드라마의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은 나이가 제법 지긋한(?) 남자들이다.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이는 여주인공과 열여덟 살 나이 차로 설정되어 있는 <내 생애 봄날>의 강동하(감우성 분)다. 마흔 다섯 살의 그는 축산업체 하누라온의 대표이다. 다음은 <아이언맨>의 주홍빈(이동욱 분)으로 서른여섯 살의 게임업체 대표이다. 그 가운데 가장 젊은 남자는 <내겐 너무 아름다운 그녀>의 이현욱(정지훈 분). 서른 두 살의 작곡가이자 연예기획사 대표인 그는 매달 통장에 들어오는 저작권료로 놀고먹어도 상관없는, 애완견과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유산 계급'이다.
기가 막히게도 하나같이 과거의 순애보로 인해 현재의 삶이 고통 받고 있는 이 남자들이 새로운 여자를 만나게 되는 방식은 또 '기가 막히게도' 과거의 연인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이다. 아내를 잃은 바다를 쓸쓸히 찾아간 동하, 그는 그곳에서 아내가 죽은 후 처음으로 그의 마음을 따스하게 녹이는 그녀를 만난다. 예전 아내가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듯 처음 만난 그녀는 동하의 마음을 어루만져준다.(물론 여기엔 아내의 심장을 이식받은 봄이(수영 분)라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주홍빈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우연히 마주친 손세동(신세경 분)에게서 자신이 사랑했던 그녀의 향기를 맡은 후 그는 맹목적으로 그녀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이현욱도 마찬가지다. 3년 전 죽은 애인의 핸드폰에서, 그녀 동생인 여주인공 세나(크리스탈 분)의 음성 메시지를 들은 후 이현욱은 세나를 찾는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남자 주인공 과거의 그녀와 연관이 있는 그녀들. 그녀들은 자신에게서 사랑하는 과거 그녀의 흔적을 잊지 못하는 그들의 집착 혹은 배려로, 원하든 혹은 원하지 않든 도움을 받게 된다.
이렇게 세 편의 드라마는 여자 주인공에 비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 주인공, 그것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넘치는 그를 등장시킨다. 그는, 현실에서는 그녀와 맺어지기에는 '도둑놈' 소리를 들을 만한 처지이지만, 그와 그녀를 매개하는 과거의 그녀 덕분에 그들의 사랑은 개연성을 얻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재벌남, 혹은 그에 버금가는 부유한 남자 주인공과, 그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덜한 여주인공 결합의 변형일 뿐이다. 단지 그런 전형적인 스토리가 동화 버전, 트렌디 버전, 컬트 버전으로 색채만 달리한 것처럼 보인다. <아이언맨>의 경우 등에서 칼이 돋는 기괴한 설정을 내세우고, 정작 그걸 풀어가는 건 지극히 전형적인 멜로드라마라는 언밸러스한 구성을 보인다.
단지 이전의 멜로드라마에 비해 남자 주인공의 나이는 지긋해졌고, 여주인공은 젊어졌다. 그는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상처를 얻은 시간만큼 부를 축적했다. 여주인공의 허기를, 혹은 그녀를 위협하는 주변 상황을 일거해 해결해줄 만큼의 능력을 지녔다. <아이언맨>의 손세정이나,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의 세나는 현재 어렵지만 시청자들은 다 안다. 그런 그녀가 곧 넉넉한 그로 인해 현재의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더욱 이 가을 새롭게 등장한 이 드라마들의 설정 역시 전혀 신선하지 않다. 사랑하는 여인의 심장을 이식받은 그녀. 이건 이미 윤은경, 김은희 극본, 윤석호 감독 연출의 그 유명한 사계절 시리즈 중 여름에 해당하는 <여름 향기>로 유명해진 설정이다. 그 드라마에서 송승헌이 자신의 사랑했던 여인의 심장을 받은 손예진을 보고 과거의 그녀를 느끼듯이, <내 생애 봄날>의 감우성도 아내를 잃은 바다에서 만난 그녀에게서 동일한 감정을 공유한다.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의 천재 작곡가와 가수 지망생의 만남 역시 몇몇 작품에서 보았던 익숙한 설정이다. 가요계를 배경으로 신데렐라의 탄생 역시 낯설지 않다.
가슴이 스산해지는 가을, 따스한 멜로드라마 한 편 좋다. 하지만 소리 높여 사회적 의식을 주장하던 상반기 드라마들의 흔적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사랑으로 인해 아파하고 사랑으로 인해 고통 받으며 사랑으로 구원받는, 그 예전에 하던 이야기를 버전만 달리하여 되풀이하는 지상파 3사의 드라마들을 봐야 하나 싶다. 온 국민의 트라우마가 되었던 세월호 사태조차도 그저 이제는 시간이 흘렀으니 지겹다고 하는 이 냉정한 사회적 방기의 계절에, 육아 비용이 무서워 아이를 낳기 두려워하고 결혼 자금이 없어 결혼도 미루는 이 처참한 불황기에 말이다. 현실의 사회적 배경은 단 1%도 드리워져 있지 않은, 결국은 부유한 그와 그보다 가난한 그녀의 만남을, 혹은 부유한 그와 그와 어울릴만한 배경의 그녀가 만나는 이야기로 이 가을을 달래야 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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