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내가 깎아주는 시큼한 사과가 먹기 싫어 밤에 사과를 먹는 건 건강에 좋지 않다고 어깃장을 놓는 남자가 있다. 하지만 아내는 어떡하든 남편에게 사과를 먹이려고 애를 쓰고, 이 과정에서 옥신각신 큰 소리가 난다. 여느 여염집의 부부가 보여주는 일상의 풍경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강신일이 연기하는 남편 장만호는 운이 좋은 남자다. 그토록 짝사랑하던 하숙집 주인 딸 심숙자와 결혼에 골인하고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좋아하던 이성과 만나 결혼해도 페닐에틸아민, 쉽게 말해 귓가에서 사랑의 종소리가 울리게 만드는 호르몬이 증발하고 나면 뜨겁게 타오르던 사랑의 자리에는 사랑의 흔적만이 남게 된다.

장만호-심숙자 커플도 마찬가지다. 뜨거웠던 청춘의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는, 페닐에틸아민이 증발한 후에는 ‘헌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연극의 초반부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젊은 날에 뜨거운 사랑을 해보지 않은 부부가 어디 있겠는가.

▲ 사진제공 차이무
두 사람이 교제할 때에는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워서 한 사람을 바래다주면 다른 사람이 바래다주다가 자정을 넘기기 일쑤고, 휴대폰으로 사랑의 대화를 하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커플이 부부의 연으로 결국 맺어지지만, 평생 해로하지 못하고 이혼으로 치닫는 건 사랑의 ‘정열’은 있지만 사랑의 ‘헌신’이 결여된 탓 아니겠는가. <슬픈연극>은 사랑의 정열이 지나간 뒤의 ‘헌신’이 어떻게 부부애로 끈끈하게 이어가는가를 애잔하리만치 보여주고 있다.

<넥스트 투 노멀>은 어머니 곁에서 어른거리는 아들이 사실은 살아있는 아들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라는 걸 뮤지컬이 시작한 지 30분 만에 보여준다. <슬픈연극>은 <넥스트 투 노멀>보다 한 술 더 뜬다. 남은 평생을 배우자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헌신의 의미를 넘어서서 제목의 ‘슬픈’이라는 형용사가 스포일러 기능을 수행한다. 부부애를 넘어서서 배우자 중 한 사람이 잘못 되겠구나 하고 짐작하게끔 만드는 연극이라는 의미다.

그렇다. 막이 올라간 후 30분 만에 남편 장만호는 코피를 쏟는다. 아니,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극의 초반부에 탁자의 균형이 맞지 않아 탁자를 보기 위해 누운 장만호를 보고, 아내가 잘못된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고함을 치는 장면에서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슬픈연극>은 지금 곁에 있는 배우자가 얼마나 소중한 반려자인가를 되새기게 만들어주는 연극이다. 불치병으로 남은 삶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직감하는 남편과 달리 아내는 그래도 남편이 기적처럼 살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애써 부여잡고자 노력한다. 아내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지만, 남편은 자신의 남은 삶을 깔끔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현실주의자다.

▲ 사진제공 차이무
눈물이 많은 관객이라면 손수건을 지참하지 않았다가는 낭패를 겪을 것이다. 이 연극은 다 큰 성인 남자도 훌쩍이게 만드는 저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카르페 디엠’, ‘순간에 충실하라’는 라틴어 격언을 장만호-심숙자 커플은 얼마 남지 않은 이생의 부부의 연을 통해 애잔하게 보여주며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다만 관객의 공연 관람 매너는 성숙해질 필요가 시급해 보인다. <유리동물원>에서 김성녀가 심각한 대사를 할 때 객석에서는 통화음이 울려댔고, <시카고>에서는 인터미션 때 공연 정보를 검색하면 될 것을 어느 관객은 굳이 2막 때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씁쓸한 모습을 목격했다. 이번에는 한 술 더 떠 공연 중에 태연하게 통화까지 해대는 뻔뻔한 관객도 있었다. 몰지각한 관객은 하나같이 이십 대가 아닌 중년 관객이었다. 이래서는 무대 위 배우의 열연이 빛바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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