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종영한 <따뜻한 말 한 마디>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주제 의식을 끌고 가는 화자는 송미경(김지수 분)이다. 그녀의 남편 유재학(지진희 분)이 다른 여자 나은진(한혜진 분)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감지한 송미경은 그녀와 같은 쿠킹 클래스를 다니며 그녀를 지켜본다. 하지만 송미경의 분노는 그녀보다 한 발 빠른 동생 송민수(박서준 분)의 섣부른 복수로 일찌감치 행적이 드러나고 만다. 하지만 송미경은 당당하다. 비록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자신과 가정을 꾸려왔던 남편, 자신과의 사이에 아이를 둔 아빠인 남편을 빼앗아 간 그녀를 단죄하는 것에.

<따뜻한 말 한 마디>란 드라마는 처음 견지했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유재학과 나은진은 잠시 서로에게 '미혹'되지만, 그들은 서로 자신들이 가정이 있는 존재임을 놓지 않는다. 결국 드라마는 흔들렸던 두 가정의 행복으로 끝난다.

그런데 만약 <따뜻한 말 한 마디>라는 드라마가, 가정의 행복과 안녕을 주제 의식으로 삼지 않았다면, 나은진의 자아 찾기, 사랑 찾기가 이 드라마의 주제가 되어버렸다면 어땠을까? 동시간대 1위는 아니었지만, 시청자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아마도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막장을 피하고자 <유혹>은 여러 가지 장치를 준비한다. 우선 '사랑'을 도발하는 주인공 유세영(최지우 분)은 사랑도 모른 채 마흔이 넘어 조기 폐경이 오도록 회사 일에만 매달리는 CEO로 그려진다. 그런 그녀가 홍콩에서 만난 차석훈(권상우 분)-나홍주(박하선 분)를 보고 알 수 없는 질투를 느낀다. 자신은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져가는데, 한없이 서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이 부부에 대해, 뜬금없이 파멸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세영은 선배와 운영하던 회사 자금으로 인해 벼랑으로 몰린 차석훈에게 돈을 매개로 한 '사랑'의 딜을 제시한다. 차석훈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살까지 감행하려던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며 유세영이 던진 '함께하는 3일'의 딜에 손을 맞잡는다.

굳이 몇달 전 종영한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끄집어낸 것은 <유혹>의 시작점에 놓인, 우리 사회의 평균적 의식에 따른 부도덕한 계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순애보로 마무리 지어져도 두 사람의 만남을 매개했던 '돈'으로 얽혀진 '원죄'를 <유혹>은 넘어설 수 있었을까? 또한 과연 종영을 맞이한 <유혹>은 이런 부도덕했던 가정 파괴의 원죄를 극복했을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혹>은 갖은 장치를 마련한다.

차석훈 가정을 파멸에 이르게 할 제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세영은 차석훈을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그에 반해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던져 차석훈을 구하려 했던 나홍주는 불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나홍주의 계속되는 의심과 불신은 차석훈의 가정을 깨는 주체를 나홍주로 만든다. 심지어 이혼하기도 홀가분하게 차석훈과 나홍주 사이에는 아이조차도 없다. 덕분에 홍콩에서 유세영의 딜은 그저 해프닝으로 덮어진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가정을 깨뜨린 유세영과 그녀에게 미련을 놓지 못하는 차석훈에 대해 나홍주는 복수를 결심한다. 이를 위해 그녀 자신이 먼저 복수의 도구로 강민우(이정진 분)의 가정을 이용한다. 나홍주로 하여금 유세영만큼, 혹은 유세영보다 더 부도덕한 길로 가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차석훈과 나홍주의 가정을 깨뜨리고 싶다는 유세영의 욕망은 어느 틈에 평생 사랑 한번 못해 본, 그리고 이제 '암까지 걸린 고통 받는 운명의 자아 성찰이자 순애보로 돌변한다.

물론 유세영의 순애보의 여정도 만만치 않다. 자신을 망가뜨리며 덤벼든 나홍주의 복수에 손을 잡은 강민우 덕분에 유세영의 회사는 위기에 빠지고, 차석훈은 하는 일마다 태클을 받는다. 하지만 단 한번의 유세영의 딜에 목숨을 던져 남편을 구하려던 나홍주가 결혼을 파괴하는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과 달리, 유세영은 그런 위기 상황을 겪으며 오히려 차석훈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키워간다. 나홍주가 믿지 못했던 사랑에 유세영은 오히려 의지한다.

하지만 대가는 치명적이다. 유세영은 마치 그녀의 도덕적 딜의 죄값이라도 받는 양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수술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차석훈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일말의 기회조차 놓친다. 그리고 이제 언제 끝날지 모를 항암 치료의 여정만 남아있다. 하지만 유세영은 다시 일어선다. 그녀에겐 사랑하는 차석훈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혹>의 캐스팅이 유세영 역에 당대의 여전한 스타 최지우가 아니었다면, 최지우가 나홍주의 역을 맡았다면 <유혹>의 스토리가 지금처럼 전개되었을까? 이상하게도 <유혹>은 첫 회부터 고고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최지우가 연기한 유세영에게 마음이 쏠리게 된다. 분명 나홍주와 차석훈이 부부인데, 불륜인 유세영과 차석훈에게 마음이 간다. 정식 아내는 나홍주인데 어쩐지 그녀가 미덥지 않다. 오히려 이 부부를 탐하는, 그러면서도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유세영에게 마음이 자꾸 쓰인다. 이것이 <유혹>의 매력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도도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최지우의 매력일까?

아이러니한 건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독설을 내뿜던 송미경에게 열광했던 멜로드라마의 애시청자층이, 이번에는 <유혹>의 불륜을 품은 순애보에 열광했다는 사실이다. 가정 파괴를 부르는 불륜을 징벌하고자 하는 도덕적 잣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에서도 놓치지 않는 순애보로 포장된 유혹은 또 다른 이야기였을 뿐일까? 그게 아니면 현실에서는 가정을 공고히 하고 싶지만, 나도 유세영처럼 돈으로 시작해서라도 다시 한번 누군가와 순애보를 이루고 싶다는 숨겨진 욕망의 발현이 <유혹>이라는 기괴한 판타지로 드러난 것일까? 그게 아니면 남편의 신실함을 믿지 못했던 나홍주의 어리석음에 대한 우화였을까?

이 아이러니한 열광만큼, <유혹>은 차석훈과 유세영의 앞날을 알길 없는 모호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실한 순애보로 마무리되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과연 비록 몸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하룻밤의 딜이, 저렇게 순애보로 기승전결이 이루어져도 되는 것인지, 도덕적 논리적 딜레마를 해소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욕망을 순애보로 마무리하는 그 얕은 판타지에 쉬이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