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를 눈앞에서 취재한 기자들이 분노와 슬픔, 좌절, 죄의식 등으로 인한 과민반응·발작·수면장애 등 트라우마 증상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방송학회 방송저널리즘 연구회와 방송기자연합회 재난보도 연구분과가 12일 방송회관에서 <재난보도와 트라우마>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강상현 교수는 “해외에서는 사건사고나 재난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겪는 취재원과 취재진의 심리적 외상, 즉 트라우마(trauma)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이뤄졌다”며 “반면, 우리나라는 재난보도의 내용과 방식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상대적으로 피해자와 기자들이 겪는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했다”고 세미나의 의의를 설명했다.

▲ 9월 12일 오후2시 방송회관에서 '재난보도와 트라우마'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개최됐다ⓒ미디어스
세미나 주제 자체가 ‘재난보도’라는 점에서 한국사회 큰 충격을 준 세월호 참사가 중심이 됐다. 그리고 이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배정근 교수는 국내 신문사·방송사 기자 367명(세월호 참사 취재 집단 270명과 비 취재집단 9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트라우마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기자들 43.1%, 세월호 영향 ‘선박사고’를 충격적인 사건으로 꼽아

기자들은 ‘충격적인 사건 경험’에 43.1%의 압도적 응답으로 '선박사고'를 꼽았다. 뒤로는 살인(13.1%), 자살(10.5%), 자연재해(5.6%), 화재(4.9%), 성폭행(4.6%) 등이 차지했다. 해외의 경우 보통 자동차->살인->화재 순이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이와 관련해 배정근 교수는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라고 풀이했다. 특히, 세월호 취재집단 기자들의 선박사고를 꼽은 비율은 52%를 기록했다. 설문조사는 세월호 사건 발생 한 달이 지난 5월 중순부터 한 달 간 진행됐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사건충격척도(Impact of Event Scale, IES)' 22문항에 대한 설문 결과, 일정 수준의 절단점을 넘으면 PTSD로 진단된다.

배정근 교수는 IES 절단점을 25점으로 계산, 세월호 참사 관련 기자들의 45.9%(124명)가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를 보인다는 결과를 얻었다. 조사대상 기자 중 124명이 한 달 이상 과각성(자극에 대해 정상보다 과민하게 반응하는 상태)과 회피, 침습(발작의 시작), 수면장애·정서마비·해리 증상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배 교수는 이와 관련해 “45.9%는 매우 놀라운 결과다. 전쟁 관련 기자들도 28%이하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당황스러웠다”고 밝혔다.

▲ 9월 12일 오후2시 방송회관에서 '재난보도와 트라우마'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개최됐다. 이날 배정근 교수는 세월호 참사 관련 기자 45.9%(124명)가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를 보였다고 밝혔다ⓒ미디어스
이번 설문조사에서 배정근 교수는 세월호 참사 관련 취재 분야를 ‘구조현장(팽목항)’, ‘유가족(진도체육관)’, ‘비현장(정부 대응 등)’으로 구분해 조사한 결과, 유가족들을 취재한 기자들의 경우 27.07로 가장 높은 외상 증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비현장의 경우는 25.34, 구조현장은 21.43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배정근 교수는 “유가족을 취재한 기자가 구조 및 수색을 취재한 기자들보다 외상 증상이 높았다”며 “이는 현장이 바다 한가운데라서 참혹한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배 교수는 “그러나 유가족의 비통한 모습과 사연을 취재하면서 연민과 감정이입 같은 감정적 요인이 더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

‘취재기자’와 ‘사진기자’, ‘영상기자’ 등 취재 직종에 대한 외상증상은 “분노”, “슬픔”, “충격”, “좌절감”, “공포”, “죄의식” 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직종별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한 부분은 순서와 강도면에서 조금씩 차이가 났다. 취재기자는 슬픔(4.46)->충격(4.39)->분노(4.23)->좌절(4.07)->죄의식(3.44)->공포(2.89)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사진기자는 슬픔(4.45)->분노(4.00)->충격(3.90)->좌절(3.58)->죄의식(3.03)->공포(2.70) 순이었다. 영상기자는 슬픔(4.72)->충격(4.55)->분노(4.49)->좌절(4.32)->죄의식(3.64)->공포(3.38) 순으로 집계됐다.

배정근 교수는 “전반적으로 방송 영상기자는 다른 기자에 비해 감정의 강도가 강렬했다”며 “순간적으로 정지화면을 포착하는 사진기자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화면을 촬영하는 영상기자의 작업 특성의 차이가 반영된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날 세미나 패널들은 세월호 참사에 있어 기자들이 느낀 ‘죄의식’이라는 감정에 주목했다. 제대로 된 보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좌절감과 그로 인한 기레기라는 표현과 현장에서 드러난 취재거부, 폭언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세월호 취재 기자들, 유가족들에게 고통 준 것에 대한 죄책감 커

이날 세미나에서 무엇보다 기자들의 외상 스트레스 장애가 다른 직군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원인과 그로 인한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배정근 교수는 이번 설문조사 결과 “세월호 취재기자들은 강렬한 슬픔과 분노, 충격, 좌절감, 죄의식을 느꼈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는 기자들이 자신이 취재하는 사건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객관주의 보도원칙의 허구성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기자들은 사건사고를 접하면서 ‘객관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고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는 달랐다는 결론이다. 배 교수는 “특히, 객관주의 직업관을 주장하는 기자일수록 외상 증상이 심했다”며 “‘세지 않으면서 센 척하는’ 기자들의 행태가 외상 대체에 가장 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미나 패널로 자리한 SBS 이정애 기자는 “세월호 참사를 취재한 기자들을 만났었다”면서 “다들 ‘이번 사건처럼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이정애 기자는 “기자들은 계속되는 오보로 인한 죄책감이 큰 것으로 드러났다. 또, 취재현장에서 울었다는 기자와 진도체육관에서 인터뷰를 50번 이상 거절당하면서 자괴감에 빠진 기자도 있었다”며 “그들은 서울로 올라와 현재 취재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악몽을 꾸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취재 기자들은 자신들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유가족들에게 줬다는 점을 큰 죄책감으로 느끼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정애 기자는 “데스크에서는 아이템의 여부와 함께 이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현장에서 느끼는 심리적 외상도 체크해야한다”며 “트라우마를 안고 취재를 하는 것은 사건과 피해자에 대한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 결국, 언론인으로서 신뢰를 구축하고 더 나은 기자가 되기 위해 이는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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