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는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은 단순한 액션영화가 아닙니다. SF 장르의 요소를 잔뜩 취했고 그 비중이 훨씬 더 큰 액션영화입니다. 사실상 주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SF입니다. 액션은 그것을 치장하고 있는 수단입니다. 행여라도 스틸을 보고 스칼렛 요한슨의 화끈한 액션을 기대하신다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SF 영화를 볼 때 가급적 관대한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오류를 간간이 범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정도라면 용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그래비티>조차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었으나 부수적인 문제였을 뿐이니 영화의 전체 완성도에 큰 영향을 줄 것까진 아니었습니다. 영화라는 게 기본적으로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하기에 어느 정도는 보는 입장에서 감수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일일이 꼬집을 의도는 절대 없었습니다만, <루시>는 인내심의 한계를 실험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루시>는 흔히 알려진 속설에서 출발합니다. <리미트리스>에서 이미 봤던 것처럼 인간은 뇌의 극히 일부만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을 만약 최대치로 끌어올린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루시>가 근본적으로 기대고 있는 이 속설부터 틀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했다는 말을 인용해서 인간은 평생 뇌의 10%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이 거의 정설처럼 알려졌으나 이것은 엄연히 사실이 아닙니다. 케케묵은 오류인데도 아직까지 이것을 설파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기꺼이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건 애교에 불과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뤽 베송은 뇌 사용률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것으로서의 사명, 시간, 진화, 유산 등을 논하려고 합니다. 영화의 첫 질문과 마지막 질문에서 <루시>는 뇌 사용률이 몇 퍼센트든 인류의 역사를 위해서 우린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질책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우리는 약물의 부작용으로 뇌 사용률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루시라고 하는 여자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루시의 행보는 초지일관 허무맹랑한 변이에 근거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지금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이 영화는 몰입하기 힘든 과장과 허풍을 거듭합니다. 오죽했으면 "혼자 엑스맨이나 어벤져스 모두를 상대하고도 남을 것 같다"와 "아... 그래도 하늘을 날 수는 없구나"라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반대로 볼 때 이 모든 걸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면 웬만큼 즐길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루시>는 뤽 베송의 지나친 야심이 망친 영화에 가깝습니다. 먼저 자신이 원했던 것이 오락인지 철학인지 분명히 하고 경계를 세웠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소재에서 주제를 이끌어내는 방법과 과정에 근거와 설득력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도통 몰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태여 주제를 진지하게 주장하려고 뇌 사용률과 결부시키려는 고집을 부릴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도입부를 비롯해 종종 삽입하는 다큐멘터리 화면은 숫제 이 영화를 유치한 농담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데 일조합니다. 올해 본 최악의 영화 중 하나인 <트랜센던스>와는 같으면서도 다른 게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뭔가를 읽는다면 "꿈보다 해몽이다"는 말에 딱이고, 재미와는 별개로 완성도에서는 더 떨어집니다.

그가 다시 철학을 탐한 것은 새삼스럽지 않지만 <루시>는 의욕이 지나치게 앞선 나머지 제대로 정리조차 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쏟아내는 데만 몰두합니다. 괜히 거창한 설정과 현학적인 대사를 남발하면서도 액션영화로서의 속도를 버리지 않으려고 한 것은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합니다. 덕분에 뇌 사용률을 10% 이하로 떨어뜨리면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게 볼 수도 있을 영화지만 완성도는 조잡한 지경이 됐습니다. 스스로도 만족스럽게 수습할 방도를 찾지 못했는지 성급하게 문을 닫고 마는 결말은 허무하기만 합니다. 그 이전에 모든 지식을 섭렵한 인간이 고작 약물 하나를 스스로 만들지 못해 온갖 난리를 부리는 것부터가 넌센스입니다. 뇌 사용률이 올라가자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걸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윤리의식의 절대적 저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마도 뤽 베송은 흥행이라는 약에 취했던 모양입니다.

★★☆

덧 1) 최민식은 자기 몫을 하고 있습니다. 각본이 빈약해서 <레옹>의 게리 올드만 같은 역할은커녕 굳이 필요했던 캐릭터인지마저 의문을 갖게 하지만 존재감은 사뭇 드러납니다. 이걸 계기로 할리우드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수도 있겠네요.

덧 2) <루시>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드디어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진짜 한국인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늘 한국인이랍시고 나오는 사람이 교포 3세 정도로 들릴 만큼의 어눌한 발음을 구사했던 것과 달리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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