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르르 꺄르르 꺄르르 꺄르르 초록의 대지를 달리는 알프스 소녀의 하이디처럼, 스무 살 새내기의 청춘을 만천하에 흩뿌리며 순정만화 오프닝과 같이 앙증맞게 뛰쳐나오는 소녀. 그 맑고 고운 웃음소리만큼은 이온 음료 광고의 모델 같아서 청량하기 그지없다.

소녀는 귀퉁이에 앉아 한 몸처럼 기타를 붙이고 늘 같은 구간의 멜로디를 반복하는 ‘선배’를 불러본다. 하지만 매사 심드렁하다가 소녀의 구애를 거절하는 일에만 다급해지는 이 얄미운 선배는 첫사랑의 심벌이 되고 싶어 하는 자칭 ‘개대여신 이수지’의 마음을 몰라줘 애태우는데.

79년생 정명훈과 85년생 이수지. 실제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이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선배, 선배!’ 선배라고 나지막하게 부르면 시큰둥하기 짝이 없어 결국, 목청을 높여 ‘선배!’라고 악을 쓰고야 마는 수지와 청순한 그녀를 화나게 하는 남자 명훈 선배의 능청맞음을 그대로 코너명에 담았다.

이 코너는 몇 년 전 첫사랑 신드롬을 파생했던 영화 건축학개론의 패러디다. 이 영화를 통해 첫사랑의 심벌이 된 가수 겸 배우 수지를 또 하나의 수지가 연기한다는 사실부터가 웃음이 나는 개그 소재다.

꿈속에서 사는 여자 수지는 마음만큼은 캠퍼스의 여신이며 순정만화의 여주인공이다. 나풀나풀한 원피스를 입고 웃으면서 달려 나오다 관객들의 시선에 겁에 질린 듯 멈춰 서서는 소리를 지르는 그녀.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 요정 아니에요.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이라고요.” 그리고 잔뜩 자신의 미모에 도취되어서는 맑고 영롱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꺄르르 꺄르르”

개그 코너는 그 시대의 세태를 반영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개그콘서트의 코너 대부분은 무시 못 할 비중의 극단적 여성 혐오와 외모 비하 개그로 채워져 있다. 안타까운 것은 여자 개그맨들 또한 적극적으로 그 추세를 따라주고 있다는 점이다.

“수지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넌 못 생긴 게 아니라 아름다운 오징어라고 생각하면 돼.” 급기야 수지를 울리고야 마는, 마이너스 백 점짜리 명훈 선배와 수지의 고백을 듣지 않으려고 꽹과리와 몸부림을 동시에 치는 근지 선배의 진저리로 웃음을 주는 ‘선배, 선배!’는 분명 외모 비하 개그의 일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뜻밖에 선배, 선배!는 위화감이 없다. 여자 개그맨의 외모를 비웃는 남자 개그맨이나 자학중인 그녀들을 보며 따라 웃다가 무언가 몹쓸 짓을 하는 느낌에 인상을 쓰게 되는 거북함이 없다. 그것은 딱히 콘텐츠랄 것 없이 그저 사람의 외모를 비웃고 따돌리는 한정된 소재에서 머무는 기존의 코너와는 달리 독자적인 아이디어와 빛나는 연기력이 이 코너의 완성도를 ‘외모 비하 개그’ 이상의 것으로 상승 시켰기 때문이다.

선배, 선배!에서 빛나는 것은 무엇보다 반짝반짝거리는 이수지의 탁월한 연기력이다. 이미 전작 황해에서부터 걸출한 연기력으로 재능을 증명했던 그녀였다. 능청맞게 신입이를 조련하던 보이스피싱 조선족 아줌마가 어쩜 이리 앙증맞고 청량한 스무 살의 캠퍼스 여신을 완벽 묘사 해낼 수 있는지 매회 감탄이 나올 따름이다.

이수지는 특히 목소리에서 울리는 존재감이 탁월하다. 적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수지의 원맨쇼로 때우는 이 코너를 상기하면 그녀의 존재감과 걸출한 연기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낯 뜨거울지도 모르는 대사를 참으로 능청맞게 연기하는 그녀가 이제는 정말 개대 여신 이수지 같아 귀엽기까지 하다.

독자적인 콘텐츠를 가진 이 코너는 디테일 또한 감탄이 나올 만큼 잘 구성되어 있는데 스무 살 수지가 아이유에 빙의 되어 소담하게 부르는 러브송, ‘너의 의미’는 선곡부터가 탁월했다. 바로 정명훈의 “아이고. 의미 없다.”에 되받아쳐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네 모든 것이 내겐 커다란 의미라는 수지의 고백을 명훈 선배는 “수지야. 속으로 불러줄 수 있겠니.”라고 날려 보낸다.

잘생긴 얼굴에 실없는 행동을 해서 큰 웃음을 주는 정명훈의 진가가 모처럼 빛나는 코너이기도 하다. 복학생 패션으로 잔뜩 멋을 내고 기타를 들고 앉아 똑같은 멜로디를 구간 반복하는 그. “또 또하-” 그가 무슨 곡을 연주하고 있는가를 알고 나면 더 큰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는데 바로 김광석의 명곡 ‘서른 즈음에’를 그는 매일 리플레이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외모 비하 개그의 윤리적 문제는 따로 논의되어야겠지만 개그 콘서트 내에서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그저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것 외엔 별다른 콘텐츠도 희소가치도 없는 여자 개그맨들의 한정된 영역이었다. 걸그룹 수지와 개그맨 수지의 역설적 건축학개론. 소재부터가 외모 비하 개그일지도 모를 이 코너가 가치를 갖는 이유다.

드라마와 예능 연예계 핫이슈 모든 문화에 대한 어설픈 리뷰 http://doctorcall.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