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발판을 둔 <해적>

<군도>와 <명량>에 비해 무게감이 다소 떨어져 보이던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은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했던 드라마 <정도전>을 보았다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적>은 조선 건국에 큰 발판으로 작용했던 '위화도 회군'으로 시작합니다. 김남길이 연기한 장사정은 요동을 치러 간다는 사명을 안고 전투에 임했으나 이성계가 회군을 결정하자 반발하고 나섭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그 유명한 '사불가론'을 살짝 패러디하여 인용합니다) 명령 불복종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그는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함께 가까스로 도주합니다. 비굴하게 사느니 산적이 되겠다고 했지만 현실에선 변변치 못한 도적질로 입에 풀칠도 못 하는 신세입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여월은 여자지만 오랜 해적 생활 끝에 모종의 사건을 거쳐 두령의 자리에 오릅니다. 의리와 형제애를 중시하는 여월은 예기치 못하게 조정의 계략에 휘말리고 맙니다. 그 결과 보름 내로 고래가 삼킨 조선의 국새를 찾아오라고 명령한 것을 꼼짝없이 따라야 할 판국입니다. 이리하여 여월과 장사정은 각기 다른 목적으로 고래를 찾아 나섭니다.

<해적>에서 두 사람이 고래를 찾는 연유 역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굴욕적이지만 당시 이성계가 새 나라를 건국한 직후에 한상질을 명나라로 보내 국호와 국새를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국호로는 '조선'이 내려졌으나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 국새는 그만 고래가 삼키고 말았던 것으로 나옵니다. 물론 국새를 고래가 삼켰다는 건 상상의 산물입니다. 이것은 이성계가 건국 초기에 '조선왕보'라는 국새를 썼던 것과 이어지면서 <해적>의 주제를 나타내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태종에 이르러서야 명나라로부터 받은 '조선국왕지인'을 사용했는데, 이 간극 사이에 있었던 사연을 그럴 듯하게 창작하고 있는 것이 <해적>입니다. 이를테면 광해가 사라졌던 기록에서 착안했던 <광해>와 같은 셈입니다.

유머로 연마한 양날의 검

그렇다고 해서 <해적>이 <광해>처럼 진지하고 적당히 무거운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분명 소재와 주제만 놓고 보면 그럴 것처럼 보이지만 <광해>는 물론이고 <군도>와 비교해도 더욱 가볍고 유쾌합니다. 이석훈 감독의 이런 연출은 그가 코미디에 강하다는 게 크겠으나 <캐리비안의 해적>의 영향도 무시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종일관 매서운 얼굴을 한 손예진과 달리 김남길은 <해적>의 코미디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합니다. 주로 유해진이 웃음을 양산하면서 명불허전임을 보여주고, 김남길도 조니 뎁의 잭 스패로우와는 약간 거리를 두면서 그럭저럭 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마케팅에서 일찌감치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해적>은 꽤 웃기고 즐거운 영화입니다. 적어도 유머 코드만큼은 어지간히 관객에게 먹힐 것 같습니다. 다만 이것은 영화에 양날의 검처럼 작용합니다. 거의 웃기는 데 주력하는 판세를 보이면서 <해적>의 소재와 주제는 시간이 갈수록 옅어지고 맙니다. 더욱이 같은 맥락에서 산과 바다 그리고 벽란도를 종횡무진하며 크고 작은 말썽을 일으키느라 전개는 더디기만 합니다. 중요하디 중요한 국새 때문에 고래를 잡는다고 난리법석을 피우면서도 좀처럼 바다에 나갈 생각을 안 하고, 막상 무대를 옮기면 제작비의 한계 때문인지 활약이 시원찮더라는 얘깁니다. 다시 말해서 <해적>을 <캐리비안의 해적>과 같은 해양 모험물로 생각하시면 실망하기 십상일 겁니다.

유머에 지나치게 몰두한 탓에 <해적>은 소재와 주제를 바닷물에 희석시키면서 몇몇 캐릭터마저 허비합니다. 급기야 한국 코미디 영화가 주로 저지르는 실수처럼 '감동과 교훈 심기'에 급급한 나머지 부실한 결말로 막을 내리는 건 정말 아쉬웠습니다. 동일한 목표를 두고서 해적과 산적에 더해 조정의 개입까지 복잡하게 엮으면서도 영화의 톤은 제각기 따로 놀고, 정작 이 세 파트를 하나로 묶어줄 구심점은 멀찍이 종적을 감추면서 집중력을 잃은 것이 결정적인 패인입니다. 아마 직접 보고 나서 <해적>과 <캐리비안의 해적>을 비교하면 무슨 얘긴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결말을 보면서 <해적>이 더 안타까웠습니다. 영화든 드라마든 현실비판과 이상추구의 도구로서 역사물을 택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정도전>이나 <광해> 등을 보면서 우리가 희열을 느꼈던 것도 그런 목적 아닌 목적이 작품에 담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군도>에 이어서 <해적>도 정작 이걸 제대로 표출하질 못하고 있습니다. 두 영화 모두 결말에 다다라서야 카드를 꺼내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던 전개로 인해 '구색 갖추기'로 보일 따름입니다. 차라리 유머를 좀 죽이더라도 의미심장한 은유를 지닌 고래를 충분히 살렸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됐을 것 같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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