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흥행에서 대패했기에 별 기대 없이 본 덕인지 의외로 <사보타지>의 초반은 꽤 좋았습니다. 일단 액션이 제가 딱 좋아하는 아날로그 스타일이었습니다. 요즘은 히어로 무비가 대세인 관계로 <사보타지>처럼 총기를 난사하는 액션영화는 보기가 쉽지 않아졌습니다. 그로 인한 갈증을 <사보타지>가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주는 것 같아서 반가웠습니다.

액션과 함께 버무려진 미스터리 스릴러의 요소도 흥미를 끌었습니다. 도입부를 지나면 사라진 돈의 행방은 묘연한 채로 동료들이 차례대로 죽자 범인을 찾기 위한 수사가 시작됩니다. 일순위로 떠오르는 용의자들이 악명 높은 카르텔의 하수인이라는 것도 흥미를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사보타지>는 이 갈래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로 존 외에 또 한 명을 주역으로 합류시키면서 수사물 형식을 띄기도 합니다. 덕분에 중반부까지의 분위기 조성은 제법 그럴 듯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흘러서 이것이 방심에서 온 섣부른 짐작이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중반부를 지나면서 범인의 윤곽을 조금씩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때부터 <사보타지>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매끄럽지 않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석연치 않은 여운을 남기는 가운데, 결말에 다다를수록 그 모든 것이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영화의 중심에 두기 위한 무리수였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안 그래도 보는 내내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아닌 다른 배우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을 들었습니다. 그의 존재가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IMDB'를 보니 원래 <사보타지>는 액션이 아닌 미스터리 스릴러에 가까웠던 모양입니다. 그걸 제작자가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대량 삭제하고 액션이 돋보이게끔 편집했다고 합니다. 데이빗 에이어의 전작인 <스트리트 킹>과 <엔드 오브 왓치>를 생각하면 그가 원했던 <사보타지>가 어떤 영화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결말은 설상가상 실소를 자아내게 합니다. 그나마 붕괴를 버티고 있던 기둥이 이 결말 때문에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누가 봐도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위한 결말이라는 걸 훤히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도 역시 제작자의 반대에 따른 자충수였습니다. 원래는 지금보다 암울한 버전으로 두 개를 찍었는데, 제작자가 둘 다 싫다고 해서 나온 게 지금의 결말입니다. 낯간지러운 장면이라는 건 둘째 치고 영화의 이야기까지 와르르 무너뜨리는 길을 선택해야만 했을 감독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냉정하게 말하면 결과적으로 <사보타지>는 아놀드 슈왈제네거 때문에 훨씬 좋은 영화일 수도 있었던 걸 망친 셈입니다. 정치에서 물러나고 할리우드로 돌아와서 여러 편의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두 팔 벌려 환영했고, 재미있든 재미없든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노익장을 응원했지만 <사보타지>를 보니 이제 보내줄 때도 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구시대의 유물과 영광에 젖어서 현세대의 능력을 저해한다면 과감하게 용단을 내리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

덧) 결국 불쌍한 사람은 데이빗 에이어입니다. 샘 워싱턴, 조쉬 할로웨이, 테렌스 하워드 등의 좋은 배우를 가지고도 아놀드 한 사람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네요. 곧 개봉하는 <퓨리>만큼은 다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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