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윤종빈
멀티캐스팅이란 산을 넘은 <군도>
캐릭터 설정과 한데 어우러진 액션도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역시 정두홍인가!?"라는 감탄사를 토하고 싶을 만큼 <군도>의 액션은 돋보였습니다. 다른 걸 떠나서 국내 영화 중 그토록 선을 잘 살리는 무협 액션은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특히 <형사>에서 이미 엿봤던 강동원의 액션은 <군도>에서 한층 유려해졌습니다. 아마도 칼을 그렇게 잘 다듬어진 동작으로 쓸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정우가 연기한 돌무치가 곧고 화통한 상남자라면 강동원이 연기한 조윤은 곱고 사악한 미남자입니다. 자연히 둘의 액션은 차별화를 뒀고 각각의 캐릭터 특성이 액션에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돌무치와 조윤만이 아니라 <군도>는 다른 캐릭터 하나하나에게도 저마다의 특성에 따른 병기를 주면서 액션을 다양화시켰습니다. 이런 분배와 배합은 <군도>의 이야기와 볼거리를 풍성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건 바꿔 말하면 얼마 전에 개봉했던 <역린>과 달리 멀티 캐스팅의 난제를 그럭저럭 풀었다는 의미입니다. 윤종빈 감독답게 돌무치와 조윤을 중심으로 둔 <군도>는 땡추, 노사장, 이태기, 천보, 마향 등의 주변 인물들에게 저마다의 개성과 성격을 부여했습니다. 이들이 간직한 사연도 간결하게 풀면서 공공의 적이자 공통의 목적을 심었고, 이것을 함께 부여잡고 하나로 집결하면서 <군도>의 멀티 캐스팅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군상을 이뤘습니다. 이리하여 <군도>는 캐릭터를 살리면서 멀티 캐스팅의 난제를 해결하고 수준급의 액션을 보여주고 있으나, 다른 방면에서 커다란 구멍을 남겨놓고 마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이것은 <역린>이 안고 있던 폭탄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과도한 애정에 걸려 넘어진 윤종빈
<군도>를 묶어 넘어뜨린 밧줄은 바로 조윤입니다. 한참을 생각해도 이건 조윤이라는 캐릭터를 향한 윤종빈 감독의 지나친 애정이 투영된 결과인 것 같습니다. <드래곤 길들이기 2>가 악역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치부했다면, <군도>는 과욕이 지나친 나머지 영화의 절반이 마치 조윤을 위한 항변처럼 보이고도 남을 지경입니다. 이런 사심은 의도치 않게 다른 캐릭터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치면서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영화 전체의 초점은 거의 조윤에게 맞춰져 지루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테면 비중을 절반씩 나눴을 때 이쪽의 50%는 돌무치와 나머지 패거리에게 분산시켰다면 저쪽의 50%에는 오직 조윤만 있습니다. 당연히 무게중심은 조윤에게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정우의 카리스마와 능청스러운 연기가 아니었다면 졸지에 들러리로 전락하고도 남았습니다. <군도>에서의 강동원이 좋지 않았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반작용으로 인해 하정우의 능력이 더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조윤에게 가진 윤종빈 감독의 애착은 더 나아가 '민란의 시대'라는 부제가 붙은 <군도>의 내러티브까지 해쳤습니다. 앞에서 <군도>가 관객의 이입을 끌어내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고 했습니다. 간단하게 비교하자면 <광해>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를 <군도>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기어코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봐도 이렇다 할 대리만족이나 카타르시스 같은 게 전해지질 않습니다. 정작 영화의 중심에는 지배세력의 횡포와 착취에 시달리는 민초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릴 대신한 건 악역이라기엔 참 아름답고 우수에 찬 조윤입니다. 물론 캐릭터 자체가 굉장히 복합적이고 예민한 내면을 가졌다는 건 인정하나, 영화가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것을 밖으로 내몰고 다른 캐릭터를 희생하면서까지 조윤에 집중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돌무치가 대의보다는 사적인 복수심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은 일종의 안티 히어로로 받아들 수 있었지만, <군도>는 결코 조윤의 초상화에 그쳐선 안 되는 영화였습니다. 그의 그림을 그리는 데 조금만 덜 수고했다면 지금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가 됐을 것 같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