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현미의 ‘남편 바람기 잡는 법’이 인터넷상에 큰 화제가 됐다. 21일 KBS 2TV 여유만만에 출연한 현미는 ‘어떤 남자가 열 여자를 마다하겠냐.’ ‘잘난 사람과 살 때는 50%만 차지해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평범한 남자를 만났다면 몰라도 잘생기고 유능한 남자를 만난 이상 바람은 감수해야하는 것.’이라는 충격적인 폭탄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현미의 말은 통합하여 “잘난 남편과 살려면 바람은 감수해야”로 명명됐다. 온통 인터넷을 뒤덮은 강렬한 헤드라인을 보며 ‘에이, 설마 저런 말을 방송에서 했을라구. 과장한 것이 아닐까.’ 했었는데 막상 방송을 보고나니 그런 생각이 싹 가신다. 딱딱한 문체로 축약된 기사의 정보는 그나마 그녀를 변호해준 수준이었다. 현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폭력과도 같았다.

"내가 볼 때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해요. 바람이라는 거는. 나는 내가 여자가 아니고 남자라면 저도 바람 펴요. 왜?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이 있을 땐 한 번 더 쳐다보게 되는 게 본능이에요. 우리 여자는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못하는 것뿐이지.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 그건 내 자유란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한참 똑같은 사람을 보다가 새사람을 보면 한 번 더 보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잖아요? 그러니까 전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해요."

이날 여유만만의 주제는 ‘내 남편 바람기 잡는 법’이었다. 이미 방송가에 파다한 바람둥이 남편을 참아주고 살았던 안개의 가수 정훈희와 밤안개의 현미가 출연해 전 간통전문 형사 구무모, 민성원 소장과 함께 남편의 바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수다를 떨었다.

현미는 남편 고 이봉조를 연예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최고의 바람둥이라 칭했다. 이봉조는 마치 코디네이터를 앞세우는 남자 아이돌처럼 아내의 친구 정훈희를 데리고 다니며 일명 ‘바람막이’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을 당한 정훈희 또한 바람의 상처를 안고 있다. 거의 해탈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이제 “남자들 속에서 살아서 남자 편을 들 수밖에 없다.” “바람이 끝나고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아오는 남편이라면 용서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배려해주고 이해해주고 용서해주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라고 정훈희에게 던진 조영구의 질문을 현미가 받아들어 거든다. “하도 이봉조란 남자가 잘생기고 연주할 때 그 모습이라는 거는…… 여자들이 보면. 남자끼리도 반해요. 그러면 여자가 열로 섰어요. 어떤 남자가 그렇게 (여자들이) 열로 서서 사랑한다고 하는데 (불륜) 안 할 사람이 있으면 백 명에 하나 나와 보라고 그래요!” 마지못해 웃는 여자 MC의 밍밍한 리액션이 블랙 코미디 같다.

현미와 정훈희의 발언은 그녀 자신들이 겪었던 트라우마와 고통을 호소하는 형식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선택을 아랫세대들이 가르침 받아야 할 어르신의 지혜처럼 설파하는 것이라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미담이나 자랑거리처럼 내 남편은 연예가 최고의 바람둥이였다고 열변을 토하는 현미는 소위 여자 마초라 불리며 같은 주제로 스트레스를 주는 엄앵란의 사례를 들어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엄앵란 씨하고 나하고는 한 말이 있어요. 잘난 사람하고 살 때는 50%만 차지해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자.”

그녀들 표현대로 잘난 남편을 둔 죗값으로 너무 쉽게 용서해버린 바람둥이 남편을 향한 회고를 딱히 나무랄 생각도 없고 참견하고 싶지도 않다. 덧붙여 내 남자의 바람도 모자라 친한 언니 동생 사이에, 언니 남편의 불륜을 도운 셈이나 다름없었던. 혹은 내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친한 동생마저 이용당해야했던 잔혹한 여자의 일생사에 연민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다. 나는 왜 공영방송에서 ‘내 남편 바람기 잡는 법’이라는 주제를 놓고 일평생 남편의 불륜에 치를 떨어야했던 경험자의 ‘불륜 저주’가 아닌 ‘불륜 옹호’ 혹은 ‘불륜 지향’에 대한 소견을 시청자가 새겨들어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이며 두 사람의 약속이다. 간통죄가 폐지됐대도 평생 서로에게 충실해야 할 ‘정조의 의무’는 결혼의 기본 의무다. 이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애초에 결혼이라는 서약이 존재해야 할 필요가 없다.

한국 드라마의 거장 김수현 작가는 2006년 그녀의 명작 ‘사랑과 야망’을 리메이크한다. 갖가지 인간군상의 일대기를 다룬 이 작품에서 아직도 잊지 못하는 명장면은 착해빠진 남편 홍조(전노민 분)의 바람을 알게 된 아내 선희(이유리 분)의 새벽 울음이다.

그야말로 선인을 넘어선 성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홍조가 첫사랑 미자(한고은 분)를 잊지 못해 밤새도록 그녀의 창문을 응시하며 집 앞을 서성인다는 사실은, 사실 선희뿐만이 아니라 시청자에게도 같은 통증의 배신감이 스몄다.

사실을 알고도 참고, 참고 또 참던 선희는 스며들어오는 송곳 같은 아픔에 잠들지 못하는 새벽녘 소리 죽여 울음을 터뜨리고야 만다. 하얀 잠옷을 입고 입을 막은 채 꺽꺽 우는 이유리의 모습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애처로우면서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한 여인의 소리 죽인 비련으로 끝나고야 말 것 같았던 이 장면은 며느리의 통곡을 목격한 시어머니의 어마무지한 대응으로 통쾌하게 마무리된다. 그토록 성치 않은 다리의 며느리를 못마땅해 하던 시어머니 박준금은 아들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부모 죽인 원수를 본 것처럼 달려든다.

급기야 팬티 하나만 입고 내쫓아 보내라는 그녀의 일갈은 그토록 쓰라렸던 홍조를 향한 배신감을 씻은 듯이 치유해줬다. 격동의 시대를 다룬 이 작품은 그 시대상에서도 혹은 70을 바라보는 노장 김수현의 생각에서도 ‘잘난 남편을 뒀으니 바람 정도는 용서해라.’는 고리타분하고 폭력적인 사상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잘난 남자를 가졌으면 바람기는 감수해야 할 몫이며 이런 남편은 50%만 차지해도 만족하자는 현미의 발언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무차별적인 그녀의 참고 사는 여성을 향한 찬미, 남편의 바람 옹호론을 들으며 언어폭력이 따로 있을까? 싶었다. “웬만한 바람은 눈 감아줬다. 나 하나만 참으면 가정이 편안하니까 참았다. 그것을 파헤치면 뭐하겠나. 오늘이 중요하지 어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 가수 현미 ⓒ연합뉴스
하지만 손 꼭 부여잡고 “우린 이 남자의 50%만 가진 것도 감사해야해.”를 나눴을 엄앵란과 현미의 대화를 떠올리니 문득 연민이 스친다. 엄앵란 또한 여자의 할 도리는 무조건 참고 사는 것이라는 폭력적 조언을 쨍쨍한 목소리로 외치던 이 방면의 대가 아니었던가.

너무나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그것을 트라우마라고 인식할 여유조차 갖지 못한다.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상처를 급기야 철학처럼 위장하고 당당히 아침마당에 출연해 “남편의 바람쯤이야 참아주는 것이 여자의 미덕!”을 외치는 그녀들이 정말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배우자의 바람을 고통으로 인식하지 못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차라리 그 사실을 부정하고 철저하게 남자 중심의 가치관을 도덕과 미덕으로 정립하는 것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방법이었을 테니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런 남자를 이해해줄 수 있었느냐는 MC의 질문에 정훈희가 답한 “저는 남자들의 세계에 속해서 남자들의 편에 서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어요.”라는 항변이 애잔하게 박힌다.

그녀들에겐 선희의 시어머니가 없다. 바람피운 아들을 팬티 바람으로 내쫓아줄 올곧은 정신과 가치관을 정립한 어르신이 존재치 않았다. 왜 저런 남자를 만나? 라며 현미 언니를 이해 못하던 정훈희는 급기야 비슷한 또 하나의 남자를 만나 이제는 2014년의 대한민국 TV에서 왜 그런 남자를 만났어요? 라는 질문을 되받고 있다.

상처와 고통을 자책으로 떠넘긴 그녀들은 이제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가치관을 하나의 지침서처럼 만들어 아랫세대에게 전파하고 있다. 나는 결코 틀리지 않았노라고. 어쩜 이날 논란이 된 현미의 발언은 차라리 편집하지 않은 제작진이 더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남편의 바람기 잡는 법’이라는 주제를 놓고 시대의 희생양인 그녀들을 출연시켰다는 것이 더 문제다. 이제 대한민국 아침 프로도 진짜 어르신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바람피운 아들을 팬티 벗겨 내쫓아보낼 수 있는 홍조 어머니의 당당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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