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한데, 그 중 하나가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십 년 이상을 남남으로 지낸 두 남녀가 한 지붕 아래에서 살다 보니 문화적인 차이가 표출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이렇다. 남편은 치약을 아무렇게나 짜서 쓰는 반면에 아내는 맨 아래에서부터 짜서 쓰는 습관에 익숙해 있다. 아내는 치약을 쓰는 습관을 자신에게 맞추고자 남편에게 말하면, 남편은 맨 아래에서부터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라 아내의 이야기를 잔소리로 받아들이고 짜증을 낸다. 아내는 남편의 취향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시각대로 교정하고자 하니 치약 하나 쓰는 것으로부터 충돌이 일어난다. 이는 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틀린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상대를 교정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부부싸움이 아닐 수 없다.

▲ 뮤지컬 ‘프리실라’ 조권 ⓒ박정환
뮤지컬 <프리실라>는 1994년에 만들어진 호주 영화를 뮤지컬로 옮긴 무비컬이다. 영화를 고스란히 뮤지컬로 옮겼다면 틱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뮤지컬에서는 초반에 틱에게 아들이 있음을 드러내기에 스포일러가 될 리가 없다. <프리실라>에서 틱이 겪는 아들에 대한 두려움은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틱은 성소수자다. 한 여성과 결혼해서 아들까지 두었지만 틱은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다. 이런 아빠를 어린 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틱의 고민이다. <라카지>에서 게이 부부가 아들을 입양하는 것과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대개의 아들은 자신의 부모를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로 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들은 얼마나 커다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까. 혹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괴물이나 몹쓸 사람 취급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것이 틱의 고민이다. 성정체성이 다른 걸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말이다.

▲ 뮤지컬 ‘프리실라’ 조성하 ⓒ박정환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거부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치약을 어떻게 쓰느냐를 두고 다투는 부부의 사례처럼 서로의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다를 바 없다.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지 않고 틀림으로 간주하면 다양성은 사라지고 자신의 잣대에 맞춰서 상대방을 교정하려고 애쓰게 된다. 다른 걸 틀림으로 바라볼 때 교정하려는 시각이 만들어지고, 이로부터 다툼과 충돌이 발생한다는 이야기다.

외적인 요소로만 보면 <프리실라>는 신디 로퍼와 마돈나의 노래를 하나 가득 담아낸 주크박스 뮤지컬로 보인다. 하지만 다르다는 사실을 다르다는 사실로 받아들일 건가, 아니면 다른 걸 교정의 시각으로 보느냐 하는 화두를 제시하는 뮤지컬로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점은 명심해야 한다. 다른 걸 다름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교정하려고 하게 된다. 교정을 받는 입장에서는 자신을 지적하고 정죄하고 고치려고 하는 시각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는가. 다양성이 사그라지는 빈자리에는, 다른 걸 교정하려는 시각과 교정하려는 이를 거부하려는 시각의 충돌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 뮤지컬 <프리실라>는 틱과 아들의 상관관계를 통해 다양성의 공존에 대해 관객에게 묻고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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