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 난 잔치에도 먹을 게 있더라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북미 반응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블록버스터라기엔 영리한 영화"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스타워즈 시리즈 중 제국의 역습에 비유한 것도 적절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여러모로 영리합니다. 우선 크레딧을 보면 특이하고 또한 전편과도 다르게 앤디 서키스의 이름이 첫 번째로 나타납니다. 물론 모션 캡쳐로 연기한 그의 노고가 대단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서는 인간이 아닌 시저를 필두로 한 유인원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아쉽긴 하지만 왜 개리 올드만의 분량이 10분 내외에 머물러야만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일면 당연한 선택입니다. 전편에서 이미 시저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발전시켰으니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으로서는 그걸 이어받아 영화를 완성해야 하는 숙제를 안았습니다. 이걸 풀기 위해 도입한 해법은 나중에 또 다른 의미까지 남기고 있습니다.

전편의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속편

전편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한 마디로 '리부트의 진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리부트이자 리메이크인 동시에 오리지널 <혹성탈출>의 이전을 다룬 프리퀄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성격을 단 한편에 모두 담았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고 인상적이었던 건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계관에 대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이었습니다. 오리지널에서는 지능을 갖추고 언어를 습득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유인원이 무기를 가진 인간을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이것을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인간에게만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해명했습니다. 아울러 <혹성탈출>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해 인류를 위협하는 핵전쟁에 대한 경고를 품었다면,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과 그것을 맹신 및 남용하는 인간의 교만을 지적했습니다.

오리지널을 보완하고 현실을 반영했던 전편으로 인한 부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여전히 흥미로운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단순히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넘어서 평화와 공존이 불가능한 세계의 역사를 인류학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을 보면 시저와 유인원은 마치 인간처럼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걸 드러내고자 삽입한 도입부의 사냥은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더 나아가 도구는 물론이며 다른 동물을 이용할 줄 아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화합'을 강조하는 시저의 의지와 달리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는 상대가 나타납니다. 즉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유인원의 사회를 인간의 그것과 하등 다를 게 없는 구조로 그린 것입니다.

따라서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동물을 학대하고 핍박하는 인간의 잔인한 본성과 이기심을 비판하려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시저가 자조하면서 "유인원이 인간보다 나은 존재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다툴지언정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유인원을 인간과 구별 짓기 위해 삼았던 신조를 스스로 포기하는 대목은 씁쓸한 비극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시저의 아들인 '파란 눈'의 시점으로 아버지를 대신한 코바를 따르면서 목격하게 되는 일련의 광경도 주체와 객체만 뒤바뀌었을 뿐, 오래도록 인간이 행했던 폭력의 역사와 고스란히 닮았습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동물을 비교대상으로 삼아서 관객으로 하여금 성찰하게 유도하지 않고, 거울을 보는 듯한 영화로 영원히 해소하지 못할 것만 같은 인류의 역사적인 숙명을 조망토록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로 보는 인류의 역사

무슨 말인고 하니,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전편보다 더 멀리 이야기를 확장했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은 결국 인간과 유인원에 빗댄 서로 다른 두 문명의 충돌입니다. 이를테면 영토 확장과 제국주의의 야욕이 태동했던 시기에 마야 문명을 파괴한 스페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말살한 영국 등을 슬며시 투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동류의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손쉽게 인간을 비판하는 대신, 인간(말콤)과 유인원(시저)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하나의 간절한 바람을 관객에게 내내 전달합니다. 그 바람이란 넓게 말해서 평온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었으나, 태생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한번 어긋났던 관계는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이와 같은 묘사는 소수의 신뢰가 다수의 불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더 현실적으로 와닿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 악은 없습니다. 물론 각자의 입장에 서면 상대가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나, 양쪽 모두가 지닌 본질적인 목표는 결코 다른 누군가를 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과거의 경험 탓에 불신으로 피어나고, 이것이 다시 공포와 불안으로 번져 서로 화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화 속 이야기에서 두 개의 축으로 대립했던 시저와 코바의 캐릭터가 전편으로부터의 영향을 간직했다는 것에서도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드라마에 집중하면서 중반에 약간 평탄한 감은 없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완성도에서 만족합니다. 이왕이면 여러분도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을 먼저 감상하시고 극장을 찾으시길 권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3편이군요. 만약 새로운 혹성탈출 삼부작이 완전하게 이전의 프리퀄로 기능한다면 결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과연 이 절차를 그대로 밟을 것인지,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것인지 흥미진진하군요!

★★★★☆

덧 1) 한 가지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은 사실 전편에서 시저를 보살폈던 윌입니다.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려고 욕심을 부렸던 것이 결과적으로 인류를 위기에 몰아넣은 바이러스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시저는 윌 때문에 인간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윌은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으나 시저를 친구 또는 동등한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전편을 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시저도 이걸 알고 있었습니다.

덧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저는 윌을 추억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시저의 현실감각과 자각능력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편에서 윌의 청을 거절하고 숲으로 들어간 건, 그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으면서 둘이, 더 나아가 인간과 유인원이 함께할 수 없다는 걸 정확하게 인지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두 영화의 결말은 애석하지만 그대로 겹쳐지고 있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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