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국산 공포영화가 개봉했다기에 반가워서 극장을 찾았습니다. 1990년대였나요? 한때는 여름에 맞춰서 납량특집처럼 공포영화가 줄줄이 개봉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즈음이 한국 공포영화의 황금기였으나, 결과적으로 관객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완성도를 갖추지 못하면서 거의 사장됐습니다. 공포영화 붐이 일자 거기에 맞춰 졸속으로 기획하고 제작한 티를 벗지 못한 탓에 자멸을 초래한 셈입니다. 할리우드도 그렇지만 공포영화는 저예산으로 제작하여 수익을 얻는 패턴이 잦은 대표적인 장르입니다. 예산이 적은 만큼 각본과 연출 등이 아이디어로 승부를 봐야 하는데, 문제는 도리어 그것에서 한계를 역력하게 드러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상황입니다.

올 여름에 최초로 개봉한 국산 공포영화인 <소녀괴담>은 제작여건이나 환경이 그리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스타 파워가 절실한 우리나라의 극장가에서 강하늘과 김소은은 그 이름만으로 관객의 이목을 끌기엔 미력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완성도는 높지 않았지만 흥행에서는 재미를 쏠쏠하게 봤던 <고사: 피의 중간고사>와 <고사 두 번째 이야기: 교생실습>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예산으로 시작했다는 게 벌써 보이죠. 더욱이 <소녀괴담>은 또 학교가 배경이고 학생이 주인공입니다. <여고괴담>을 필두로 하여 국산 공포영화에 단골로 등장했던 것들이니 이젠 식상할 대로 식상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소녀괴담>도 그걸 아는지 약간의 변주 내지는 갖가지 소재를 혼용하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인 인수는 귀신을 볼 수 있는 능력 탓에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귀신이 한을 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착한 아이입니다. 전학을 일삼던 끝에 결국 인수는 삼촌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얄궂게도 삼촌 역시 귀신을 볼 수 있어 위안이 되어주지만 어린 시절의 악몽이 떠올라서 괴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이 와중에 인수는 아름답지만 귀신이 되어 떠오는 한 소녀와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가집니다. 한편 학교에서는 계속해서 왕따가 발생하고, 과거에 그로 인해 죽은 소녀가 나타나 자신을 괴롭힌 아이들을 하나둘씩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남은 아이는 단 둘밖에 없습니다.

눈치를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소녀괴담>은 줄거리를 쓰기 쉽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가 난잡합니다. 학교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나름 차별화를 두려고 괴담을 차용하려던 모양인데, 막상 영화를 보면 괴담이 괴담으로 보이질 않는다는 점에서 말썽이 일어납니다. 이런 형편이니 제목은 왜 <소녀괴담>인지조차 설득력이 없습니다. 괴담을 뒤로 한 <소녀괴담>은 대신에 흡사 <소나기>의 영향을 받았는지 소년과 소녀의 로맨스에 더 집중합니다. 설상가상 김정태가 연기한 소년의 삼촌은 코미디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 자체의 효과는 순전히 김정태 덕분에 꽤 효과적이지만, 두 가지 모두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기초를 해치고 마는 심각한 패착으로 작용합니다. 더 나아가 귀신의 정체와 퇴치까지 <소녀괴담>은 별별 소재를 다 갖다 붙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공포영화의 맥을 탄탄히 하기는커녕 역으로 송두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의 원인은 중심을 잡지 못한 감독의 연출에 있을 것 같습니다. 깊이 따질 것도 없이 <소녀괴담>은 연출의 톤에 있어서 확실한 결심을 하지 못한 채로 갈팡질팡을 일삼다가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됐습니다. 공포영화면 공포영화답게 가거나 애초에 작심하고 B급 영화를 표방했어야 하는데, <소녀괴담>은 정색하고 공포로 갔다가 허허실실 코미디로 왔다가 달달한 로맨스를 섭렵하더니 사회 문제까지 어필하려고 하면서 다리가 꼬여 제 풀에 나가떨어졌습니다. 가만 보면 이게 공포영화인지 코미디영화인지 로맨스영화인지 분간하질 못할 지경입니다. 특히 이야기를 섞지 못하고 내내 따로 놀게 하다가 결말부에 다다라서야 급박하게 하나로 뭉치려고 하니 병목현상이 발생하고 만 꼴에 이르렀습니다.

코미디야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적절하게 썼더라면 괜찮았겠으나 구태여 로맨스를 들먹여야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소년과 소녀의 관계를 부각시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감동적으로 이끌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의 <소녀괴담>은 시간을 무리하게 소비하고 장르의 본질을 망각하면서까지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로맨스로 화를 자초했습니다. 이게 더 아쉬운 건 속편의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환도사>를 연상시키는 <소녀괴담>의 일부는 만약 영화가 성공했다면 시리즈로 이을 수 있는 여지도 갖고 있었습니다. 괜한 데 눈을 돌리지 말고 캐릭터에 좀 더 집중했더라면 흥행이 웬만큼만 돼도 그걸 이어받아서 속편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김정태와 강하늘의 콤비도 꽤 그럴 듯하게 보였는데 완성도가 엉망인 상태라서 요원하게 됐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정통 호러를 목표로 했다면 좋았을 것을...

★★☆

덧) 근래 할리우드에서 개봉하는 일련의 공포영화에는 여전히 집과 가족이 있고, 우리나라의 그것에는 지속적으로 학교와 학생이 있습니다. 각 사회의 가치관과 이것을 이루고 있는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한 단면인 것 같아서 씁쓸하네요. 미국은 가족의 붕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지만 우린 이미 붕괴된 상태나 마찬가지고, 10대가 집보다 배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학교니 모든 초점은 거기로 향하고 있습니다. <소녀괴담>을 보면서도 그랬지만 이런 문제에서 더 가관인 건, 그 원인을 면밀하게 찾지 않고 학교와 학생에게 죄다 전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성세대는 늘 뒷짐이나 지고 있으며 개선의 의지마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 주제에 나라의 미래를 걱정한다니, 참 같잖은 헛소리죠.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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