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합니다. 여기서 '이런 류'라 함은 생소한 소재를 다룬 영화를 가리킵니다. 케빈 코스트너의 영화 중에 애쉬튼 커처와 함께 해양구조요원으로 출연했던 <가디언>을 재미있게 봤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신의 한 수>도 영화 속에서 과연 바둑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지 궁금해서 호기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신의 한 수>는 <타짜>보다 더 끌렸습니다. 바둑에 비하면 '국민 오락'인 고스톱은 훨씬 친근하니까요. 적어도 제게는 그렇습니다.

사실 저는 바둑에 문외한입니다. 저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께서도 <신의 한 수>를 보기 전에 망설이신다면 아마 이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고심했다는 것이 역력하게 보입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관객이 바둑의 세계를 모른다면 제작진 입장에서는 소재를 오롯이 활용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영화에서 가르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볼 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깊이 파고들지 않으면서도 관객으로부터 몰입과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심리적인 부분에서 이야기와 밀접하게 연계시키거나, 아예 소재를 그 이상으로 키우지 않으면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의 한 수>의 조범구 감독은 둘 중에서 더 쉬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자로 가기에는 위험부담이 적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해서 바둑을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그 영화는 반쪽짜리입니다. 이를테면 근래 트렌드를 이루고 있는 히어로 무비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원작을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고, 원작을 알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어야지, 원작을 모른다고 해서 관객이 재미를 얻지 못한다면 실패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신의 한 수>도 바둑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보기에는 아쉽지만 그 자체를 선뜻 비판할 순 없습니다. 오히려 관건은 이 선택으로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이도저도 아닌 시도에서 그치는 바람에 비판이 배로 커져서 쏟아질 수 있다는 부담을 안아야 합니다.

다행히도 <신의 한 수>는 용케 패착을 피했습니다. 극도의 긴장과 집중을 요하는 현실 속 바둑 대국과 달리, <신의 한 수>는 일부를 제외하면 도입부부터 군더더기를 말끔히 걷어내고 시원하게 내달리는 데 집중합니다. 이 과정에서 바둑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흥을 돋우는 소재로 머물고 있습니다. 패착, 포석, 가계, 사활 등으로 단락을 나누면서 바둑 용어와 이야기를 조화시키는 노력을 했다는 것만큼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를 제외하면 <신의 한 수>가 바둑의 묘미와 정수를 충실하게 전달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타짜>와 비교할 수 있는데, <신의 한 수>는 소재로부터 긴장을 형성하면서 이야기를 그리는 대신에 액션을 펼치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다는 것에서 다릅니다.

이 차이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두 소재에 대한 관객의 각기 다른 이해도 등에서 비롯됐을 것입니다.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겠지만 관객에게 바둑의 세계와 본질을 상영시간 내에 빠르게 전달하고, 그것으로 극적인 긴장감을 이루고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인정한다면, 지금의 결과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신의 한 수>는 꽤 잘 만든 오락영화입니다. 조범구 독의 전작인 <퀵>과 비교하더라도 <신의 한 수>는 뒤지지 않는 속도감과 액션으로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결말부에서는 특히 <우는 남자>에게 기대했으나 아쉬움으로 남았던 걸 훌훌 털어낼 수 있는 고강도 액션으로 통쾌한 마무리를 합니다. 얄궂게도 이정범 감독이 <아저씨>에 미치지 못하고 <우는 남자>로 눈물을 지었다면, 조범구 감독은 <퀵>에서 질주에만 정신이 팔린 탓에 잊었던 완급 조절 및 액션과 드라마의 조화를 <신의 한 수>에서 찾았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신의 한 수>가 연출과 각본에서 <타짜>로부터 제법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한편, 무협영화의 공식과 클리셰를 두루 차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도입부입니다. 복수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주인공을 몰아넣는 데 이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줄 대상을 만나는 것은 무협영화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아울러 수련(?)하는 과정을 빠르게 압축해서 보여주는 몽타주 시퀀스도 마치 무협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바둑의 고수가 장님이고 외팔이와 비슷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약간 만화적인 요소도 더러 보이는 걸로 봐서는 조범구 감독이 만화와 무협영화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지금처럼만 한다면 속편을 기대해도 괜찮겠습니다.

★★★★​

덧 1) 정우성은 영화계에서 인정하는 무술 특화 배우라는 걸 <신의 한 수>에서도 보여줍니다. 어쩜 그렇게 액션마저 멋있게 소화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면 이시영은 솜씨를 발휘하지 못했네요. 이범수의 악역 연기도 좋았습니다.

덧 2) 캐릭터 하나하나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도 맘에 들었습니다. 단역급 캐릭터도 참 재미있게 나오더군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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