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시작

2012년에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을 봤을 때는 과장을 아주 약간 보태서 경이적이었습니다. "이소룡은 죽었다. 성룡은 늙었다. 이연걸은 약하다"라는 자극적이면서도 자신만만한 카피를 달았던 <옹박>을 넘은 전율이었습니다. 상영시간 내내 한 건물 내에서 복도와 방 등의 좁은 공간을 자신만의 특질로 승화시키면서 보여준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의 격투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그것은 과연 영화로 연출하는 게 가능한지 의문일 지경이었고, <아저씨>에서 봤던 인도네시아의 전통무술인 '펜칵 실랏'에 매료됐던 것도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을 본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이 그토록 흥분으로 가득했던 데는 감독인 가레스 에반스 그리고 펜칵 실랏의 유단자이자 배우로 변신한 이코 우웨이스와 야얀 루히안의 공이 컸습니다. 가레스 에반스는 웨일즈 태생이면서도 인도네시아 영화인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을 연출했습니다. 장편 데뷔작이었던 <Footsteps>가 주목을 받으면서 인도네시아 제작사에게 스카웃이 됐던 독특한 이력 때문입니다. 가레스 에반스에게 맡겨진 것은 다름 아닌 펜칵 실랏에 대한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이것으로 인연을 맺은 이코 우웨이스와 야얀 루히안을 캐스팅하여 첫 번째 펜칵 실랏 영화인 <메란타우>를 거쳐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을 연출했습니다. 다시 말해 가레스 에반스부터 펜칵 실랏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에 그만한 액션을 완성할 수 있었으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세 사람 모두 액션 연출(Action Choreographer)로 참여했습니다.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은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영하여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할리우드에서는 리메이크를 결정했고, 덕분에 가레스 에반스는 <레이드 2>를 제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본래 삼부작으로 계획했을 때는 <레이드 2>를 먼저 제작하려고 했으나 예산 문제로 부득이하게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을 택했습니다. 이것이 찬사를 받자 자연스레 속편을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순서가 바뀌면서 각본의 수정은 불가피했지만 하마터면 빛을 못 볼 수도 있었던 영화가 전 세계에 소개됐으니 감독으로서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편에 이어 또 다시 선댄스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던 <레이드 2>는 이번에도 관객과 평단을 실망시키지 않으면서 국내 개봉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레이드 2>를 보기 전에

<레이드 2>를 보려는 분은 먼저 다음의 세 가지를 유념하셨으면 합니다. 첫째, 아무래도 전편부터 보는 게 좋습니다. 도입부에서부터 이야기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어서 전편을 안 봤다면 어리둥절할 수 있습니다. 둘째, 상영시간이 150분입니다. 전편이 100분이었던 것에 비해 크게 늘어났습니다. 가장 중요한 셋째, 당연히 이 긴 시간을 모조리 액션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상영시간이 늘어난 만큼 <레이드 2>는 액션과 드라마를 심층적으로 조화시켰습니다. 전편처럼 초지일관 처절한 액션이 펼쳐지는 게 아니라 이야기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여기서 호불호가 좀 갈릴 것 같습니다. 액션을 잔뜩 기대하고 갔다가 이야기 위주로 흘러가는 걸 보면 실망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것만 염두에 두고 <레이드 2>를 보면 더 즐거운 감상이 될 것 같습니다. 이하의 글은 굳이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이번에도 드라마는 있다

전편에서 가까스로 건물을 탈출한 라마는 비밀경찰과 접촉합니다. 이들은 라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가족을 보호해줄 테니 조직에 위장 잠입하여 수사를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아시겠죠? 이것만 보면 영락없이 <무간도>가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신세계>도 있었으니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레이드 2>를 폄하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두 영화와 비교하면 <레이드 2>는 단지 범죄조직에 잠입한 경찰이라는 소재만 공유할 뿐입니다. 이것은 다른 영화(도니 브래스코, 폭풍 속으로, 분노의 질주 등등)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설정이라서 진부하여 아쉬울 수 있을지언정 큰 단점으로 지적하긴 어렵습니다. 벌써 <무간도>와 <신세계>를 들먹거리면서 비난하는 걸 심심찮게 봤는데, <레이드 2>는 어디까지나 정체성 혼란으로 인한 심리적 갈등이 없는 통쾌한 액션영화입니다. 조직의 일망타진이 아니라 부패한 경찰을 모조리 찾아내 처벌하는 것이 잠입 목적이라는 것도 조금은 다릅니다.

<트랜스포머 4>의 액션에는 없는 것

방금 "어디까지나 <레이드 2>는 통쾌한 액션영화"라고 했으나 드라마가 마냥 들러리로 전락하진 않습니다. 이것이 또 한번 열광케 했습니다. 왜 그런지 말씀을 드리는 데는 공교롭게도 <트랜스포머 4>와 비교하는 게 매우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두 영화에는 기본적으로 액션을 내세운 영화면서 드라마를 가미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반면 <트랜스포머 4>가 액션과 드라마에서 모두 실패한 것을 <레이드 2>는 적어도 평균 이상으로 성공시켰습니다. 적잖은 분들이 <트랜스포머 4>의 액션마저 비판할 때는 마이클 베이답게 맥락 없이 주야장천 터뜨리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액션에도 흐름의 조절이라는 게 필요한데 무턱대고 남발하니 금세 질리기 때문입니다. <레이드 2>의 가레스 에반스는 영리하게도 그걸 피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드라마와 어우러져서 적재적소에 배치한 액션 시퀀스의 구성을 매번 달리 하고 있다는 것에서 더 돋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덕분에 궁극적으로는 이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심리적 여파를 점진적으로 증가시키고 있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레이드 2>는 '클라이막스'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습니다.

<트랜스포머 4>의 드라마가 실패한 것

액션은 차치하더라도 <트랜스포머 4>를 도저히 옹호할 수 없는 이유는 전편과 비교해도 과도하게 조잡한 드라마(각본)입니다. 불필요한 인간 캐릭터가 난입해 흐름과 분위기를 깨뜨리기 일쑤였다는 것은 이번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특히 속편을 염두에 두고 역할다운 역할도 없는 캐릭터를 등장시킨 건 쓸데없이 상영시간을 늘리게 만들어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레이드 2>도 전편과 비교하면 꽤 많은 캐릭터가 있고 속편을 예고한다는 것도 <트랜스포머 4>와 동일합니다. 하지만 <레이드 2>는 딱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고 그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드라마에서도 <레이드 2>를 두둔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레이드 2>의 이야기 구성은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라마는 경찰인 데다가 그가 잠입한 조직이 있고, 이 조직을 전복시켜 거저먹으려는 사파 조직이 있으며, 계략과 농간에 휘말려 라마의 조직과 갈등하는 반대파 조직이 있습니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각본까지 직접 쓴 가레스 에반스는 에런 크루거와 달리 영화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거기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놓치지 않습니다. 즉 주와 부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레이드 2>는 영화가 끝나면 "아~ 쟤가 저래서 나왔구나"라고 반응하지 "쟨 대체 왜 나온 거야!"로 불평하진 않을 겁니다.

명불허전인 액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가지를 쳤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으나, <레이드 2>에는 여전히 이걸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액션입니다. 건물에 갇혔던 전편과 비교하면 이번에는 훨씬 다양한 형태의 액션을 유감없이 선사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악역 캐릭터를 몇 명 심어서 그들이 펼치는 액션을 감상하는 것으로 <레이드 2>를 보는 재미가 더 커졌습니다. (이 캐릭터들은 아무래도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더군요) 달라진 배경공간의 성질을 한데 조화시킨 것도 백미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추격전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도로라는 열린 공간과 자동차라는 닫힌 공간을 수시로 넘나들면서 눈부신 액션을 선사합니다. 앞에서 달리던 차에서 카메라가 빠지더니 뒤에서 오는 자동차로 들어가서 액션을 유지하는 장면은 어떻게 촬영한 건지 궁금증마저 갖게 했습니다. 위에서 '<레이드 2>의 클라이막스'라고 표현한 장면은 전편을 능가하는 전율을 선사했습니다. 일찌감치 북미에서 화제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더군요. (아니게 아니라 보면서 "캬..."라고 몇 번이나 감탄했습니다) 이 격투는 펜칵 실랏의 모든 것과 배우들의 에너지를 모조리 다 쏟아부은 것 같았습니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건 요즘 액션의 트렌드인 짧고 빠른 편집을 고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만큼 액션의 퀄리티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것이고, 실제로 완성도가 굉장합니다. 영화 전체적으로 보면 펜칵 실랏의 특성 때문인지 넓은 공간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직선 위주였다는 것은 아쉽습니다.

가레스 에반스의 야심

<레이드 2>는 가레스 에반스의 야심으로 가득합니다. 흡사 이 시리즈로 액션 버전의 <대부>라도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요. 액션은 뭐 말할 것도 없고 각본에서도 그가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레이드 2>를 관통하고 있는 주요 테마도 결국 '가족'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 누군가는 가족을 살해하고 누군가는 가족을 지키려고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가족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레스 에반스는 이런 관계를 통해서 <레이드 2>를 비극적인 액션영화로 빚었습니다. 간혹 과욕으로 얼룩질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도 있긴 했습니다. 다른 캐릭터로 돌아온 야얀 루히안이 헨델의 '사라방드'가 흐르는 가운데 비장하면서 쓸쓸한 최후를 맞는 장면이 그랬습니다. 감독들이 종종 클래식으로 웅장한 분위기를 살리려는 노력을 하는데, 자칫하면 흉내내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을 받기 딱 좋습니다. 다행히 <레이드 2>는 그럭저럭 선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야얀 루히안의 처지를 헤아리면 음악과 잘 어울리기도 했네요. 가레스 에반스의 의욕과 야심이 성공적인 결말을 맞을지, 아니면 치기로 좌초할지는 마지막 3편에서 확인하겠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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