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벌어진지 한 달이 더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다. 나는 SNS에 인문사회 신간서적을 스크랩해 두곤 해서 종종 책에 대한 질문이나 의견을 받을 때가 있는데, 회의적인 어투로 쓰인 장문의 질문을 받았던 것이다. 질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저도 한때는 공부하고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공허할 뿐입니다. 역사, 철학, 인문학, 민주주의에 대한 몇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는데 무엇을 기여했나요? 박제되고 삭막한 원칙 몇 개와 개념정의 따위로 어떻게 참사를 막고 우리 삶을 바꾸나요? 그런 것에 탐닉하느니 차라리 수구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기술이 이 사회에는 더 도움이 될 거 같군요.”
사실 이 질문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 책을 읽는 것이 항상 세상을 바꾸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책을 읽는다고 늘 실천이 전제되는 것도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책을 읽은 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당황했다. 아마 이 질문에 드러난 냉소와 그 뒤에 깔려있는 어떤 무참함을 느낀 게 원인이 아닌가 싶지만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횡설수설이었다. 책은 우리 사회를 바꿔왔다는 둥,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타인을 만날 때 지식으로 제시되는 이념이 윤리적인 관계를 형성한다는 둥,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둥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답하기에 바빴지만, 그 질문은 그날 이후로 자주 떠오르곤 했다. 특히 ‘박제되고 삭막한 원칙 몇 개와 개념 정의 따위’가 그랬는데, 그 말을 떠올리며 나는 아무 곳에도 낙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질문을 접한 후 나 역시 똑같이 묻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 철학, 정치, 이런 책들을 곁눈질하면서 몇몇의 정의와 난해한 구절만 해독하고 있던 건 아닌가? 박제되고 딱딱한 개념을 허겁지겁 삼키면서 막상 그 개념을 추구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닌가? 다시 말해, 어떤 훌륭한 이상이 주어진다고 해서 왜 그것을 내가 추구해야 하는지, 그것에 어떻게 열정과 헌신을 다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 인간적인 이유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내가 읽어본 책은 두 해 전에 구입해 꽂아 두었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파커 J 파머, 김찬호 역, 글항아리, 2012)이었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머릿속에 남아있는 어떤 구절 때문이었다. 저자 파커 파머는 책 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 집, 저축을 잃고 시민들이 정치와 경제 시스템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는 테러의 공포에서 비롯되는 편집증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개개인은 고립되어 고통 받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고통 받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또 개인적 집단적 운명이 더 이상 우리 손에 있지 않다는 절망감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이러한 고통을 어찌할 것인가? 이는 인간이 겨뤄야 하는 가장 숙명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다.(...)“
- 파머 J 파커, 김찬호 역,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p59.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어떤 책인가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일반인을 위한 정치학 책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의 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한 시민교육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통상적인 정치학 책이 서술하는 ‘체제와 제도의 집합체로 존재하는 민주주의’를 거부한다. 저자 파커 파머는 개인이 타자와 관계하며 살아가는 삶의 확장형으로 민주주의를 정의한다. 즉 특정한 방식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의 방식이 구성원 전체의 삶의 방식으로 구현되는 것을 민주주의로 이해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만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한다. 관점, 요구, 이해관계가 우리 자신과 아주 다를 것 같은 낯선 사람들 말이다. (...) 민주주의는 그러한 사람들의 ”소대“ 수백만 개를 필요로 한다.” - p86~96
그렇다면 타인과 관계를 맺는 ‘특정한 방식’이란 어떤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변증법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1) 대상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있다.
2) 그러나 대상은 자신과 구별되는 다른 존재를 통해 대립된다.
3) 이 대립은 지양된다. 존재와 구별되는 존재에 의한 대립은 더 높은 층위로 고양되어 통합을 이룬다.
이 책에서 변증법이라는 말은 단 한번 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저자는 그것에서 영감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헤겔의 변증법을 삶의 방식에 대입하면, 1) 자유로운 개인과 개인이 2) 서로 다른 신념에 의해 충돌하며 모순을 불러일으키지만 3) 논의하고 토론하고 조율하면서 모순을 넘어 고양된 해결책을 도출하는 행위의 윤리로 전환된다.
민주주의와 삶을 통합된 것으로 파악하며 변증법적 행위 윤리를 근본적인 원리로 설정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정치가 ‘권력을 사용하여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라는 사실이 망각된 채 권력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기술)로 축소되고 구성원에게 명령만 내릴 뿐 참여를 허용하지 않는 반(反)정치의 영역으로 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다양성에 의해 점증하는 폭력과 적대의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다수결의 원칙’ 때문에 자주 곡해되지만,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신념이 충돌할 때 반대되는 신념을 가진 자들이 다수를 만들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는 정치체가 아니다. 그런 형태는 타자의 배제를 일상화하는 참주제에 가깝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양쪽의 요구가 아무리 모순되더라도 양쪽 다 존중받아야 하며 모두가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순된 요구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변증법적 방법 밖에는 없다. 양쪽의 요구를 받아 안으면서 동일성과 반동일성의 대립을 합일시켜 배제에 저항하고 통합으로 고양하는 것이다.
"강요된 해결은 거짓 해결이다. 억압은 단지 이견을 땅 밑으로 몰아넣을 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하면서 새로운 폭력을 낳는다. 미국식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삶의 끊임없는 갈등은 주고받기의 변증법 안에 억제되어 있으면서, 협력과 창의성을 생성하고 심지어 필요로 하기까지 한다. (...)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가장 중대한 교훈 중 하나로서 위기에 처할 때마다 상기해야 한다. 즉 긴장은 삶의 징표이고 긴장의 종식은 죽음의 징표라는 것이다. ‘최종적 해결’은 독일인들이 우리가 홀로코스트로 알고 있는 죽음의 통치자에 붙인 이름이다. (...) 만일 당신이 원하는 것이 긴장의 종식이라면 파시즘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p137~138
이 책이 독자들을 추동하는 방식
그러나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독자를 민주주의의 행위 윤리로 추동하는 방식에 있다. 저자는 객관적 서술을 거부한다. 자신의 비통함을 묘사하면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호출하고 다음의 사실을 강조한다. 비통함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부서짐이다. 비통함은 고통의 반응이지만,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마음을 부셔버린 타자를 파괴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을 부셔버린 타자에 응대하기 위해서는 나의 신념과 타자의 신념이 충돌하여 일어난 모순과 긴장을 가슴속에 품고 더 크고 넓은 해결책으로 이행하여 해소해야 한다. 인간의 의지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반대되는 타자의 신념에 응대하면서 불가능한 모순을 끌어안고 숙고하는 것에 있다. 그렇게 자신과 타자를 통합하며 모순과 모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내겠다고 의지하는 것이 인간의 고귀함이다. 민주주의는 객관적 당위가 아니라 비통함을 느끼는 인간의 가능성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관한 지식을 온 마음으로 붙든다면 마음은 때로 상실, 실패, 좌절, 배신, 또는 죽음 등으로 인해 부서질 것이다. 그때 당신 안에 그리고 당신 주변의 세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는 당신의 마음이 어떻게 부서지는 가에 달려있다. 만일 그것이 수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진다면 결국에는 분노, 우울, 이탈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경험이 지닌 복합성과 모순을 끌어 앉을 위대한 능력으로 깨져서 열린다면, 그 결과는 새로운 삶으로 이어질 것이다. 마음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정치란 권력을 사용하여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로서 심층적으론 하나의 인간적인 기획이다. 마음이 부서져 흩어진 게 아니라 깨져서 열린 사람들이 정치에 추축을 이룬다면, 보다 평등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세계를 위해 차이를 창조적으로 끌어안고 힘을 용기 있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p57
여기에는 어떤 종교적인 열망이 깃들어 있다. 고난과 시련을 맞이하여 자신을 재인식하고 부정적 현실을 긍정적 차원으로 승격시키려는 자세, 자신에게 비통함을 안겨준 타자에게 윤리적인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 의지, 끊임없는 시련을 기꺼이 받아 안는 인간 의지의 고귀함과 고양된 새로운 삶으로의 전망, 이 모든 것이 독자를 무력함에서 행동에의 의지로, 타자에 대한 분노에서 차이의 관용으로 이끈다.
저자는 이런 삶의 당위가 이성적 명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대변되는 내면의 소리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의 마음이란 지성과 감성이 종합된 내면으로서, “그러나 나는 한명의 인간으로서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라고 말할 때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 즉 타자를 배제하지 않고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삶은 강제의 명령이 아니라 마음이 지시하는 자발적 실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파머 파커는 민주주의를 살아내야 할 인간의 준칙을 테리 윌리엄스의 글로 제시한다.
“인간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공정할 수 있는가? 우리는 너그러울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생각만이 아니라 전 존재로 경청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의견보다는 관심을 줄 수 있는가?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용기 있게, 끊임없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동료 시민을 신뢰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 <관여>. p102
사실을 밝히자면 나는 신실한 인간이 못 되어서 그런지, 이런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저자의 많은 주장에 공감할 수 있었고, 특정 부분에서는 전율을 느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념이 박제된 문구에서 벗어나 삶의 방식과 감성적 조응으로 전환하는 순간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물론 타자를 압도적인 편견 속에서 바라보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소박한 실천을 다짐한 것도 그런 수확 중 하나에 포함되겠지만.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박제된 개념과 문구 속에서 지쳐버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위해 수구세력을 저지하는 기술 하나가 더 중요하지 않냐고 냉소하신 그분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타자를 제거하는 기술이나 말라붙은 정의가 아닌, 인간의 마음으로 지지할 수 있는 당신과 나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고덕영

2006년에 결혼했다. 결혼 직후 용돈이 궁한 탓에 한 번 사면 오래 읽을 수 있는 난해하고 어려운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게 화근이었다. 그런 책들을 오독하다 보니 '인문 딜레당트'로 '전락'하여 이런 저런 책을 뒤적뒤적하며 나락에 빠진 생활을 게속하고 있다.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로 인문 쪽 책들을 건너다닌다. 한 아이의 아빠이자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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