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같다는 표현만큼 이중적인 의미를 담은 평가도 드물 것이다. 유치하고 황당무계한 작품을 봤을 때 우리는 “이건 뭐 만화도 아니고.”라며 혀를 차고, 탐이 날 만큼 기발한 상상력이 살아 숨 쉬는 작품을 봤을 때 그 모든 찬사를 응축해서 “만화 같다.”는 감탄을 던진다.

tvN의 새 월화드라마 ‘고교처세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만화 같다.”이다.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의 만화 같다와 긍정적인 의미의 만화 같다를 모두 포함한다. 헬기를 타고 등장한 말끔한 슈트의 서인국이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존경받는 기업인의 면모를 뽐낸다. 잔뜩 으스대던 서인국은 신비롭게 다가선 이하나의 기계적인 귓속말 지령에 순간적으로 야단맞는 어린애의 얼굴이 된다.

"뭐- 뭐지. 오늘 과목이?" 엘리베이터에서 셔츠를 풀어헤치고 1교시 국어, 2교시 물리. 3교시 수학, 4교시 기술의 이질적인 스케줄을 듣다가 회사의 정문을 나서면 교복 입은 소년이 되어있다. 수업 시간이 취침 시간인 고교 아이스하키부원이 엘리트 형의 지령을 받아 낮엔 교복을 밤엔 정장을 입고 학교와 회사를 종횡무진하는 드라마. 만화 좀 봤다 하는 사람이면 한 번쯤은 접해봤을 클리셰 같은 이야기다.

낮의 고교 교사가 밤엔 야쿠자 무리를 이끄는 두목이 된다든가, 보스의 유지를 이어받아 중년의 얼굴로 교복을 입은 조직 폭력배 이야기 등. 그래서 이 닳고 닳은 만화 같은 이야기는 낡고 상투적이지만 이런 소재를 그들에게 연기하게 시켰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큼은 기발하게 만화적이다. 서인국, 이하나, 이수혁. 만화 캐릭터를 입혀보고 싶은 그들을 진짜 만화 같은 이야기에 출연시켰으니. 그들을 캐스팅함으로써 이 드라마의 “만화 같다.”는 긍정적인 의미의 “만화라서 고마워.”로 바뀐다.

대한민국에서 교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87년생의 서인국. 말라뮤트 같은 몸집에 싱그러운 소년의 미소를 가진 ‘자이언트 베이비’ 같은 그라서, 18세 본부장의 이중생활이라는 어른과 소년을 오가는 캐릭터가 그렇게 잘 들어맞을 수가 없다. 볼 때마다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가 생각나서 기존의 작품에서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이수혁에게 재력과 품위, 그리고 결핍된 부성애의 상처를 끼얹으니 제법 데인드 한스러워져서 인상적이다.

여주인공 이하나는 본격적으로 이 드라마의 만화다움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사실 이하나부터가 만화적 캐릭터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연기자이지 않은가. 대한민국 드라마 사상 최초로 백수 로맨스를 그려냈던 ‘메리 대구 공방전’에서 나는 아직도 이하나가 남긴 만화적 제스추어 몇 개를 잊지 못한다.

이하나가 연기하는 정수영은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이면서도 그리 아름다운 여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절약이 생활화된 그녀는 종이컵의 임자를 새겨뒀다가 새 종이컵을 뽑아 쓰려는 사람에게 헌 컵을 가져다주는 짠순이고, 회식 자리에서 기구를 사용해 남의 신발을 정리하는 하녀 근성까지 남아있다. 잘 보이고 싶은 남자를 위해 향수 대신 샤워 코롱을 뿌리고 초면의 사람에게 조심스레 립스틱을 구해 조커 같은 입술을 만들곤 “너무 야하지 않나요?!”라고 깜짝 놀라는 찌질이.

사랑을 책으로만 배워서 처세보다는 감정만이 앞선 나머지, 명품 같은 남자 유진우(이수혁 분)에게 화장실 프러포즈로 망신을 당하는 T.P.O 결여의 인간. 거절당한 상처에 진탕 술을 마시곤 한 손에 뻥튀기를 들고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차인 남자와의 통화를 시도한다.

이렇듯 텍스트로만 늘어놓으면 도무지 예쁜 구석 하나 없는 짠순이, 뻔순이, 찌질이 삼종 세트의 정수영이지만 이 캐릭터를 표현하는 이하나의 사무치는 사랑스러움이 도무지 그녀를 미워할 수 없게 했다.

이하나의 만화 같은 표현력이 빛나는 부분은 제스추어에 깃든 그녀 특유의 조심스러움과 수줍음이다. 헌 종이컵을 재활용하라고 건네줄 때조차 눈웃음을 지어가며 남자 못지않은 큰 키를 구부려 저자세로 굽실대는 능글맞은 디테일에 짜증은커녕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졌던 건 나뿐만은 아니었으리라.

정중하지만 사람 무안해지는 칼끝 같은 말투에 무 자르듯 거절당한 정수영이 실연의 아픔에 방황하면서 드라마는 본격적으로 만화의 장점을 드러낸다. 얼큰하게 취한 채로 버스를 기다리다 흩날리는 뻥튀기를 내려다보며 감상에 젖고 버스 좌석에 앉아 한 손엔 뻥튀기 봉투를, 다른 한 손엔 전화를 들어 차인 남자를 향해 주절주절 끊이지 않는 술주정을 나불댄다.

어찌나 수다를 떨었는지 배터리가 방전되자 이번엔 옆에 선 고교생 이민석(서인국 분)의 핸드폰을 구걸하여 또다시 끊이지 않는 한탄을 늘어놓다가 다음날 직장 상사이자 짝사랑 남인 유진우(이수혁 분)의 집에서 발견된 자신에게 기겁한다. 어쩌면 주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장면들이 이하나 특유의 수줍음과 곁들여져서 결코 거북하지 않은 만화적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래서 다음날 유수영이 전화기에 저장해둔 ‘유인우 본부장님♥♥’의 하트 두 개를 슬그머니 지우는 장면이 사무치게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배우 이하나의 매력은 속된 말로 쭈구리 같음이다.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고 싶은데 화장품을 갖고 다니지 않아 화장실에서 초면의 여자에게 립스틱을 구걸한다. 마치 만들어 붙인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고 잔뜩 비굴해진 포즈로. 건네받은 립스틱을 입술 끄트머리까지 바르고선 “아니 근데 너무 야하지 않나요?! 아닌데. 야한데? 혹시 다른 거 없나요?” 라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립스틱의 주인이 싫은 얼굴을 하자 방금 뱉은 입 바른 소리가 무안해지게 “별로 안 야하다. 에헤. 다시 보니까. 고맙습니다!” 금세 쭈구리 모드가 되어 입술을 문질문질 하는 유수영의 처량 맞음. 단언하건대 이 장면의 연기는 배우 이하나만이 100퍼센트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대본이었으리라. 궁상과 구걸, 민폐와 비굴. 이 모든 부정적인 단어들을 사랑스러움으로 치환할 수 있는 이하나.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유일무이 배우 이하나의 매력이 참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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