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영화는 영화일 뿐일까?

심심찮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는 얘길 접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완고하게 반대합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찬성할 수 있으나, 상당히 위험한 발상에서 영화의 가치와 잠재성을 가벼운 것으로 치부하는 건 경계해야 합니다. 만약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는 주장이 개인의 취향과 오락을 넘어서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악용될 때는 그걸 어떻게 수용해야 할까요? 따라서 구체적인 사유를 밝히지 않고 매우 간결하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로 일축하는 건 삼가야 합니다. 세스 맥팔레인이 <19곰 테드>에 이어 연출한 <밀리언 웨이즈>가 바탕을 둔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좋은 예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예전에는 이 서부극의 패턴이 대동소이했습니다. 비유하면 근자에 유행을 달리고 있는 히어로 무비와 같습니다. 악당이 활개를 치고 살상을 저지르면 어디선가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 그들을 심판하고 약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히어로의 탄생에 난세를 구원하고 바른 길로 인도할 우상을 필요로 한 것이 크게 작용했듯이, 무법천지였던 과거의 서부를 배경으로 보안관과 같은 법과 도덕의 수호자가 봉기하는 것을 꿈꾸는 것도 당연합니다. 다만 문제는 정의의 사도가 상대하는 악당의 정체가 매우 편향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고전 서부극의 악당은 흔히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이었습니다. 항상 인디언은 백인 마을을 습격하고 사람들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악이고, 그에 맞서 싸우는 보안관과 카우보이는 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엄연히 대대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았던 인디언을 콜럼버스가 터놓은 길을 따라 온 자들이 영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마구잡이로 해친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은 미국인의 선조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개척하는 데 따랐던 무자비하고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미화이자 변명으로 작용했습니다. 여기에 낭만주의를 보태면 고전 서부극의 완성이었습니다.

할리우드는 이를테면 고전 서부극을 통해 "이래서 우리는 인디언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라는 걸 웅변했던 셈입니다. 미처 역사를 파악하지 못하고 영화만 본 사람들은 고스란히 이 수작에 넘어갔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요? 여러분도 절대 장담하지 마세요. 인터넷만 검색하면 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조차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미디어를 통해 알게 모르게 세뇌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는 말을 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한국인이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상하게 그려질 때 커다란 논란이 일어나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도 부지불식간에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면서 살아왔는데, 그런 것들을 조금씩 깨준 것 중 하나가 여행이었습니다.

서부의 낭만을 비웃는 <밀리언 웨이즈>

고전 서부극의 이분법적 사고와 인디언의 왜곡을 깨면서 태동한 것이 수정주의 서부극입니다. 더 이상 서부를 낭만주의와 이상주의로 물들이게 두지 않고 현실적이며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세스 맥팔레인의 <밀리언 웨이즈>는 이 수정주의 서부극과 조금은 비슷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과거를 비추고 있습니다. 서부극에 코미디를 버무린 영화답게 세스 맥팔레인은 <밀리언 웨이즈>에서 서부시대를 신랄하게 풍자합니다. 제목부터가 그렇습니다. <밀리언 웨이즈>라는 괴상한 한글제목과는 달리 원제는 <서부에서 죽는 100만 가지 방법>입니다. 즉 우리가 한때 그토록 동경했던 서부시대에는 열악한 환경과 야만적인 행태 등으로 사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밀리언 웨이즈>를 보면 세스 맥팔레인이 연기한 알버트가 흥분한 상태로 당시 시대상에 대해 열변을 토합니다.

<밀리언 웨이즈>에서 나오는 서부시대에 대한 풍자(관찰?)은 더 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웃으면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15세에 결혼하지 못하면 노처녀라는 소릴 들으며, 콧수염을 기르고 총질로 사람을 서슴없이 죽이는 용기(광기겠지)를 가진 자만이 진짜 남자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 등은 당시의 서부가 어땠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흑인과 동양인, 인디언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비하성 발언을 하는 걸 보면 왠지 더 리얼하게 과거를 재현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달리 보면 <밀리언 웨이즈> 또한 과거를 진지하게 살펴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무지에서 나오는 일방적 조롱에 불과한 것도 같습니다. 그만큼 무법천지였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다는 의도에는 공감하지만, 과도하게 잔인한 장면을 수차례 삽입하여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당시를 그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제아무리 코미디 영화라고는 해도 지극히 현재의 관점에서 함부로 우스꽝스럽게 그리는 것을 마냥 가볍게 보아 넘길 일은 아닙니다.

사실 거슬러 올라가면 세스 맥팔레인의 행간은 이미 도입부에서부터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밀리언 웨이즈>는 고전 서부극의 대가인 존 포드의 영화에서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모뉴멘트 밸리를 웅장하게 비추면서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고전적인 음악까지 더해지면서 "진정코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나?"라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면, <밀리언 웨이즈>가 전개될수록 그것은 "어때? 지금도 낭만스럽게 보여?"라는 비아냥으로 바뀌고 마는 것 같습니다. 뭐 굳이 이렇게 정색하고 보지 않더라도 <밀리언 웨이즈>는 딱히 맘에 드는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초지일관 풍자가 됐든 조롱이 됐든 유머로 일관했으면 좋았을 텐데, 여기에 또 빠질 수 없는 로맨스가 섞이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가라앉습니다.

따지고 보면 득보다는 실이 컸던 로맨스도 세스 맥팔레인의 연출의도에 부합하는 것이긴 했습니다. <밀리언 웨이즈>는 온통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남자가 판을 치는 서부시대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이 모든 걸 말로 풀 수 있다고 독야청청 주장하는 남자에게 아름다운 여인이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다고 합니다. 이런 구성과는 다르게 끝내 남자는 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수정주의 서부극을 따르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총에 다른 걸 얹으면서 살짝 비켜가게 하는 것에 세스 맥팔레인이 가진 센스가 더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쿵저러쿵 해도 <밀리언 웨이즈>는 재미있게 웃고 즐길 수 없었습니다. 미국식 화장실 유머라면 환장하기 때문에 간간이 빵 터지는 대목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차라리 로맨스를 덜고 제목에 더 충실한 영화를 만들었다면 훨씬 많이 웃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

덧 1) 세스 맥팔레인은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샤를리즈 테론 사이에서 한 여자를 선택합니다. 과연 여러분의 선택은?

덧 2) 보기 전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까메오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걸 이렇게 엮을 생각을 했는지 기가 막혔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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