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일 SBS <도시의 법칙 in NEW YORK>이 첫 선을 보였다. 정글의 법칙 도시판으로 뉴욕에서의 생존기를 다룬다. 단순 여행은 아니지만, 뉴욕이라는 이국의 도시로 떠난 사람들의 고군분투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긴' 여행기에 가깝다. 그에 앞서 6월 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SNS 원정대 일단 띄워>가 방영되었다. 명목상 브라질 월드컵 특집으로, 오로지 SNS에 의지하여 브라질의 문물과 먹거리를 체험하는 여행 프로그램이다.

SBS만이 아니다. MBC는 지난 5월 30일부터 <7인의 식객>이라 하여, 이른바 스토리가 가미된 음식 기행 프로그램을 방영 중이다. 지상파 예능들은 봄 개편 이후 MBC와 SBS가 각각 한두 개씩의 여행 관련 예능 프로그램을 런칭했다. 왜 하필 지금 여행 예능일까?

이런 여행 예능의 시도에 있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 나영석 피디가 만든 '꽃보다' 시리즈일 것이다. 과연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 시리즈가 트렌드 상품이 될 정도로 인기를 끌지 않았다면 이렇게 여러 개의 여행 예능이 거의 동시에 출격할 수 있었을까. 여행을 하는 형식만이 아니다. <도시의 법칙>이나 <SNS원정대 일단 띄워>, <7인의 식객>까지 내용면에서도 <꽃보다> 시리즈에 빚을 지고 있다.

여행을 떠난다는 기본적 조건은 두 말 하면 잔소리겠다. 그런데 누가 여행을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영석 피디의 <꽃보다> 시리즈는 기존 예능의 틀을 한 단계 뛰어넘었다. 이른바 강호동, 유재석, 신동엽 등 인기 MC는 물론, 그들을 대체할 만한 내로라하는 MC진의 주도 없이, 이순재, 박근형, 신구, 백일섭 등 예능은 물론 연예계 자체에서도 뒷방 신세이던 할배들을 프로그램 전면에 끌어들였다. 또한 그들의 조력자로 기껏해야 <1박2일> 게스트 경험만 있었던 이서진을 '짐꾼'이라는 희한한 캐릭터로 등장시킴으로써 신선한 예능의 틀을 제시한 것이다.

이렇게 그간 예능에서라면 꼭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존재인 MC, 그것도 개그맨 출신의 MC없이 예능에서 낯선 연기자 출신들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 프로그램을 만듦으로써 나영석 피디는 예능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도시의 법칙>, <SNS 원정대 일단 띄워>, <7인의 식객> 등의 출연자들 면면도 김성수, 정경호, 백진희, 오만석, 서현진, 김민준, 이영아 등 신선한 연기자 출신들이 대다수다.

<꽃보다 누나> 시리즈에서 후배 이미연은 늘 따라다니는 카메라의 시선에서 과연 자신들이 어디까지 보여주어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선배 윤여정에게 털어놓는다. 그런 후배의 고민에, 윤여정은 자신들이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는 모습이 온전히 날 것만은 아닌, 연기와 리얼의 경계에 놓여 있음을 지적한다. 즉 연기자인 리얼리티 출연자들은 배우의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실제와 연기의 경계 선상에서, 보다 풍부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풀어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꽃보다 할배> 시리즈에서 짐꾼 이서진, 직진 순재 등의 캐릭터의 성공이 바로 그런 연기자이기에 가능한 지점이었다. 시청자들은 몰래 카메라를 통해 보여진 이서진의 면면이 100% 그의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 상황을 수용해낸 연기자 이서진의 진솔한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진짜인 듯 진짜가 아닌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간 연기 외에는 방송을 통해 노출되지 않은 배우들이기에 가능한 매력들이다.

후발 주자로 출발한 <도시의 법칙>, <일단 띄워 SNS 원정대>, <7인의 식객>은 선배인 <꽃보다> 시리즈의 이 성공 사례를 충실히 답습한다. 상황을 벌여놓고, 그 상황 속에 던져진 배우들의 다양한 반응들을 통해 그들의 새로운 매력과 재미를 끌어내고, 그것을 프로그램의 주된 흥미 요소로 끌어가고자 한다. 그래서 <도시의 법칙>은 예능 블루칩으로 예능에서 가장 낯선 정경호를 밀고, <SNS원정대 일단 띄워>는 소탈한 오만석과, 자유인 김민준, 야무진 서현진의 매력을 발굴하는 데 공을 들인다. 묘하게도 세 프로그램 모두에서 여성 캐릭터인 이영아, 서현진, 백진희는 남성 못지않은 털털함과 당당함으로 자리매김하며 여행 프로그램의 중심을 잡아간다.

<꽃보다> 시리즈의 주된 흥밋거리는 흥청망청 여행이 아닌 이른바 '배낭여행'으로서의 조건적 제한이다. 노년의 할배들,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들이 '배낭여행'이라는 컨셉에 따라 적은 돈을 가지고, 스스로 여행지와 맛집을 찾아다니며 벌이는 '고생'이 이심전심 보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다. 우리나라에서는 내로라하는 인기인이지만 그 사람들이 낯선 이국땅에서는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그 공감이, 거기서 빚어지는 진솔한 인간적 매력들이 시청자들을 흡인시키는 매력이 된다.

그리고 <꽃보다>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후발 주자들은 빠짐없이 이런 요소들을 포함시킨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생존기라며 가지고 있는 돈과 핸드폰부터 빼앗아 버리는 <도시 법칙>이나, 여행의 극과 극을 보여주겠다며 배낭 여행팀을 정하고 적은 돈으로 정해진 시간 안에 미션을 마쳐야 어드밴티지가 주어지는(그 어드벤티지조차도 과연 정말 어드밴티지조차 의심이 되는) 극한의 조건을 제시한다. 어떤 도움 없이 SNS에만 의존해 여행을 가야 하는 <SNS 원정대 일단 띄워>의 모습은 핸드폰에 의존해서 갈 길을 찾던 <꽃보다> 시리즈의 짐꾼이 연상된다.

이렇게 <꽃보다> 시리즈로부터 시작된 여행 예능은 이제 <도시의 법칙>, <SNS원정대 일단 띄워>, <7인의 식객>을 통해 만개하고 있다. 케이블의 아이디어를 지상파가 답습하거나 확산시키는 콘텐츠의 역전이다.

물론 <꽃보다> 시리즈 이전에도 무수한 여행 예능이 있었다. 하지만 <꽃보다> 시리즈의 성공은 여행하는 연예인의 날것의 모습을 통해 나이가 들었거나 젊거나 혹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상관없이 인간 본연의 매력을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는 데 있었다. <꽃보다 할배>에 새삼스레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노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열정적인, 하지만 지는 석양의 아름다운 노을을 보는 듯한 안타까움에의 공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후발 주자들이 성공을 거두가 위해서는, 그저 여행을 떠나거나 <꽃보다> 시리즈가 가진 재미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여행 속에서 발견한 인간미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꽃보다> 시리즈건 혹은 <도시의 법칙> 등 후발 주자건 자기 충전과 삶의 돌파구로서의 여행이 보편화된 세상을 반영한 모습이다. 일찍이 들뢰즈는 노마디즘을 설파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곳을 찾아나서는 유목주의야말로, 몇천년의 정주 문화 속에 숨겨진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21세기에 여행이 삶의 주된 반전이 되며 예능 콘텐츠로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삶과 생활 방식에 대한 권태와 회의, 새로운 삶의 대안에 대한 어쩌지 못하는 갈구의 감각적인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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