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더이상 이렇게 살기 싫어. 싫어! 싫어! 할 거야. 내가 할 거야.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 내가 하고 말 거야. 내가 이 이화영이 할 거야." 범죄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이코패스 스릴러가 아닌 다음에야 등장인물의 줄거리 없는 살의와 악의를 환영하는 관객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괴롭힘이 주체가 되는 복수극은 더 그렇죠. 보통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사람은 악이지만 복수극의 주인공이 저지르는 모든 악행은 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드라마보다 주인공을 향한 감정 이입과 동의가 필요한 장르가 바로 복수극이죠.

이런 복수극의 필연적인 FM을 고려해볼 때 최근 KBS 일일극 '뻐꾸기 둥지'는 참으로 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기형적 복수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수극의 바이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작품을 양손에 쥐고 있는 사람, 바로 그 장서희를 주인공으로 기용했으면서, 희한하게도 그녀를 복수의 가해자가 아닌 당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드라마 ‘뻐꾸기 둥지’에서 장서희와 이채영이 서로의 복수를 담당하게 된 건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중간에 끼어있는 한 남자 때문이었습니다. 6년 전 백연희(장서희 분)는 애인을 잃었고 그와 동시에 이화영(이채영 분)은 의대 다니던 오빠를 잃었죠. 물론 그건 불운한 사고였습니다. 여느 복수극처럼 누군가의 목적 때문에 의도된 타살이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그날, 딸의 가난한 동거남이 성에 차지 않아 두 사람의 공간을 습격한 아버지 일행만 없었더라면. 그래서 그가, 끌려가는 여자친구를 위태로운 오토바이에 몸을 실어 쫓아가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생기지 않았을 테죠. 하지만 그런 이유로 백연희의 부친도 아닌 백연희가 죽은 남자친구의 여동생에게 6년 뒤 복수당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이건 한마디로 시청자가 이해할 만한 복수의 동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백연희에게 이를 가는 이화영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화영을 이해하려면 백연희를 미워해야 할 텐데, 지금 그녀는 너무나 가녀리고 선량해 보이니까요. 자궁 적출 수술을 받아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된 그녀. 남편은 4대 독자에 돌아가신 시아버지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조선 시대 발상을 유지로 남기고 떠나신 데다 시어머니는 무려 사랑과 전쟁의 그분이십니다. 모름지기 복수극이란 난 요 모양 요 꼴인데 있는 대로 악행을 저지른 그놈은 잘 먹고 잘살고 있네- 라는 한탄이 저변에 깔렸어야 할 텐데 그러기엔 이 백연희 양은 지금 삶 자체가 형벌이며 고통이라 굳이 여기에 복수 한 그릇을 끼얹어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화영을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도리어 분노의 개연성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백연희를 원망하는 건 사회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서도, 공식 홈페이지에서 소개한 오빠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지극정성이라서도 아닙니다. 6년 만에 발견한 반짝반짝 빛나는 백연희는 그녀의 악몽 같았던 6년을 변명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죠. 흥미로운 사실은 상식적인 기준에서 이화영이 자신의 척박한 삶의 원인을 따져 물었을 때 오히려 백연희는 가장 멀리 있는 범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파고 들어가자면 아들 장례비로 콜라텍에서 춤추고 돌아오는 양아치 어머니나 법대 졸업하고 탱자 탱자 놀고 있는 백수 삼촌을 비롯한 이화영의 노동에 기대어 사는 잉여 가족이야말로 복수의 철퇴를 받아야 할 가장 유력한 대상이겠죠.

사랑했는데 우린 엔조이일 뿐이라며 벌거벗은 연인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정병국(황동주 분)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그녀는 내 신세를 원망했을 뿐 그를 증오하거나 복수의 대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랬던 이화영이 백연희를 만나고 나서는 그만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 만큼의 비상식적인 적개심을 품습니다. 제법 현명하고 옹골차 보였던 그녀가 이제는 아예 정상적인 사고조차 어지러운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이화영이 가진 복수의 동기는 사랑하는 오빠를 잊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한끝 차이지만, 의사 오빠가 가져다줄 뻔했던 찬란한 미래를 향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서였던 거죠. 그래서 이 복수극은 참으로 신선합니다. 주인공격인 인물이 갖는 복수의 동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아닌 그에게 받지 못한 미래의 유산 때문이라니. 하물며 억지에 가까운 이유로 화풀이의 대상을 찾아 6년의 분풀이를 해 버린다는 이 기막힌 설정 때문에 이화영의 복수는 마지막까지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고난은 6년 전 오빠를 잃은 그날이 만든 연쇄 불행이라고. 수도 없이 6년을 되풀이한 끝에 내가 상상한 미래의 현신 같은 여자 백연희를 마주친 순간, 그녀에게 백연희는 터지기 직전의 풍선에 불어넣은 최후의 입김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화영이 백연희에게 갖는 마음은 묻지 마 살인이나 다름없습니다. 한 마디로 백연희는 운이 나빴던 거죠. 그렇다고 이화영이 사이코패스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그녀의 복수심이나 그것을 부른 분노를 정의나 선으로 명명해서야 우리는 결코 이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의대생이었던 오빠를 잃었고 그래서 의사 오빠를 갖지 못했고 그 때문에 의사 오빠의 부를 물려받지 못했노라고. 그건 모두 6년 전 그 사고가 남긴 재앙이었노라고. "엄마, 우리 오빠, 오빠만 살았어두 이렇게 안 살았겠지?" "말해 뭐해. 우리 동현이만 살아있었으면 이렇게는 안 살지. 아무렴 안 살고말고! 네 오빠가 살아있었으면 온 세상 사람들 다 부러워할 의사 돼서 돈 많은 집안 여자 만나서 50평 아파트에서 그냥 떵떵거리고 잘 살았을 거야." 어쩌자고 그런 인정머리 없는 계집애를 만나서는 인생을 끝내느냐며 혀를 끌끌 차는 철부지 엄마의 부질없는 하소연. "야, 기 계집애 하나 땜에 우리 집안 기둥이 뿌리째 뽑힌 거야!" 그러나 불안정한 정신 상태의 이화영에게 그 말은 복수의 동의나 다름없었습니다. 급기야 내가 이토록 고생해야 하는 건 오빠가 그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고 나의 가난을 만든 원인은 그 여자, 백연희라는 결론으로 매듭짓습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네가 행복할 수가 있어? 다른 사람도 아닌 저 사람의 부인이 되어 웃고 있을 수가 있어? 당신 난 사랑이라 믿었어. 당신도 날 사랑한다고 수없이 말했었지. 그랬던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고? 이건 아니야.“

‘뻐꾸기 둥지’ 5회에서 백연희와 마주친 이화영의 심리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게 직접 고통을 안겨준 옛 애인 병국보다도 그의 옆자리를 가진 백연희를 향한 적개심이 더 커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심리 속엔 심지어 오빠가 저 여자를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죽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저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부정한 망상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복수극처럼 죽은 오빠를 대신해서 칼을 갈았더라면, 오빠의 분신인 조카를 꿈에서라도 상상으로라도 내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라는 오빠가 남긴 단 하나뿐인 오빠 자신인데요. "엄마, 소라 갖다 버려. 소라 내다 버리라구."

우리에게 소라를 키울 책임이 어디 있느냐고, 소라를 버리라는 말을 내뱉은 순간 화영이 드러낸 얄궂은 진심은 오빠를 잃은 상실감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의대생의 조건에 국한되어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도대체 백연희의 옛 연인이자 이화영의 친오빠인 그는 누구의 복수극을 응원해야만 할까요. 말이 없는 죽은 자를 대신해서 이화영을 응징해줄 백연희의 각성을 저는 기다립니다. 더군다나 복수극이라는 장르에서 장서희의 복수쇼를 보지 못한다는 건 서커스에서 공중그네를 놓치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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