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갑동이(차도혁; 정인기 분)가 누구인지 다 안다. 하지만, 갑동이를 잡을 수 없다. 이전에는 갑동이가 누구인지 몰라서 잡을 수 없었지만, 이젠 갑동이가 누구인지 알아도 잡을 수 없다. '미치도록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다'. 48시간을 구금해도,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다. 그의 DNA을 가지고 검사를 해봐도, 전산화되지 않은 출입국 관리국 창고를 먼지 마시며 뒤져 보아도 48시간 안에 그를 잡아들일 묘책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와 대질 심문을 하던 오마리아, 아니 유일한 생존자 김재희(김민정 분)는 오열하다 못해 그의 목을 조르고, 그런 그녀를 데리고 나온 하무염(윤상현 분)에게 절규한다. 왜 편법이라도 쓰지 않았냐고. 그 상황을 지켜보던 프로파일러 한상훈(강남길 분)은 결국 자신이 4차 사건의 진범이라며 자신을 내던진다. 범인을 잡고도 범인을 잡을 수 없는 아비규환, 이게 다 터무니없는 공소시효 때문이다.

연쇄 살인범의 추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갑동이>는 카피캣을 통해 연쇄살인을 복기하며 하나의 범죄가 가진 사회구조적 얼개를 논하더니, 이제 16회에 이르러 대한민국 법질서의 부조리함을 끄집어낸다.

결국 갑동이 사건 때문에 아버지와 딸을 잃은 하무염과 양철곤(성동일 분)의 미망은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카피캣이 되어 갑동이 사건을 환기시킨 류태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약통을 찾아들어야 하는 오마리아 아니 김재희까지, 이들은 여전히 갑동이의 범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데 갑동이는 정작 수사반장까지 되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보다 더 분통터지는 것은, 갑동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는데 편의적으로 적용된 15년의 공소시효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지켜만 봐야 하는 상황에 부딪쳤단 점이다. 물론 16회 말미 한상훈의 희생으로, 그가 4차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해 그로인해 범인이 잡히면 그 사건의 공범까지 자동적으로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법령을 이용하여 겨우 갑동이의 공소시효 효력을 정지시키는 '신의 한 수' 아니, '희생의 한 수'를 통해 비로소 갑동이 사건을 법의 심판대에 올려놓을 가능성을 살려내었다.

그런데 갑동이가 누구인지 드러난 이후, <갑동이>는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법의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갑동이>의 시작은 일탄서로 다시 돌아온 양철곤 과장과, 여전히 갑동이 사건에 매어있는 하무염, 그리고 그들이 착잡하게 맞이하는 공소시효 완료일로 시작되었었다. 그때만 해도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눈앞에서 범인을 놓치는 것도 아니고, 15년이나 지난 사건을 이제 와서라는 거리감을 시청자들은 느꼈을 것이다. 아니 갑동이만이 아니다.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사회에서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들은 쉽게 잊어야 하는 것을 하나의 비상요법인 양 장착한 채 살아왔었다.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희미해져가는 세월호처럼.

하지만 드라마 <갑동이>는 그저 두 사람의 집착으로만 여겨졌던 연쇄 살인을 과거로부터 길어 올린다. 갑동이를 존경하는 카피캣 류태오가 등장했고, 그를 치료하는 의사이며 과거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희생자인 오마리아가 나타나고, 과거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모인다. 그리고 류태오를 통해 갑동이 사건에 얽혀들며 드라마는 정죄되지 않은 과거는 끝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밝힌다.

16회 드라마 속 검사는 말한다. 법은 그 나라의 인격이라고. 인격이라 정의된 갑동이 속 우리나라의 법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도 범인을 눈앞에서 놓아줄 수밖에 없는 비윤리적인 법이다. 2007년부터 25년으로 기간이 늘어났지만, 소급 적용이 되지 않아 드라마 속 갑동이와 같은 사건은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외국의 경우 흉악한 사회적 범죄의 경우 이미 공소시효자체가 무의미하다 하여 폐지하는 사례가 일반화되고 있다. 더구나 DNA로만 범인을 알 수 있는 사건의 경우엔 공소시효 자체가 중단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여전히 법원의 편의적 방식에 따라 갑동이와 같은 사례가 등장하게 된다.

성범죄 연쇄 살인범의 예를 들었지만, 궁극적으로 한 나라의 인격으로서의 '법'에 귀결된 <갑동이>의 성취는 놀랍다. 일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법은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번거로운 신호등과도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갑동이>를 통해 그 번거롭다 느껴졌던 신호등이 제대로 신호를 보내지 않을 때, 혹은 신호를 보내기를 멈추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게 되는가를 알게 된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수의 사건들이 때로는 법의 비호 아래, 법의 방기 아래 심지어는 헌법에 위배되는 법의 판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수의 파업에서 파업 당사자들이 가장 고통 받게 되는 사례 역시 이 아이러니한 법의 판결 때문이다. 생존권과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이 파업 종료 후 뒷덜미를 잡히는 건 때 아닌 '돈'의 폭탄이다. 파업으로 인해 생산에 차질을 빚었다 하여, 혹은 파업 과정에서 많은 생산 시설이 파괴되었다 하여, 법원은 회사 측의 손을 들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에게 상상조차도 못할 엄청난 피해 보상금을 물게 한다. 얼마 전 이효리가 참여해 사회적 관심을 불러 모은 노란봉투 프로젝트가 바로 쌍용차와 철도 노동자들의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였었다. 법이라는 편의적 도구를 이용해 사회의 '을'들을 억압하는 우리나라 인격의 또 다른 민낯이다.

그렇게 한 사회의 인격이 되어야 할 '법'의 부조리하고 편의적인 모습을 드라마 <갑동이>는 그 말미에 이르러 주제로 내세운다. 제 아무리 누군가 여전히 고통을 받는다 해도, 명문화되어버린 법은 그 고통을 알아줄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까발린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그런 법의 부조리함을 없애기 위해 사회적 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애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부조리함을 방기하는 대신 끄집어내어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나라의 인격이 왜곡된다면, 그 나라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드라마는 진득하게 설명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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