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빛나는 로맨스'의 오빛나(이진 분)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선량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지나치게 말그레한 선의가 이따금 보는 사람을 피로하게 한다. 불의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 시대의 의리걸 오빛나. 그럼에도 막상 그녀 자신의 불의는 제대로 항의조차 해보지 못하고 참아 넘긴다. 그저 내 몸과 마음이 좀 고생하면 그만이지 뭘, 하고. 그래서 때론 답답이 오빛나가 추악한 모녀 사기단, 장채리 모녀보다 더 싫어질 때도 있었다.
드라마의 초반은 최악의 모자 사기단에게 당해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사기 이혼의 나락으로 떨어지더니, 한참이나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하며 제대로 된 복수극 한번 펼쳐보지 못했다. 드라마의 후반, 이제는 모녀 사기단이 그 배턴을 물려받았다. 초반보다 더 끔찍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오빛나는 여전한 자애와 이타심으로 그들을 끌어안는다.
석연치 않은 아빠의 죽음을 집착적으로 추적하여 가해자 이태리(견미리 분) 하나만이 아니라 그녀의 아들까지 복수극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여동생 오윤나(곽지민 분)의 지구력과 냉담함이 펼쳐내는 스릴러극을 볼 때마다 어디서 다른 드라마를 보는 건지 착각이 생길 정도다.
장채리가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눈물 글썽해서 항변하는 것 외엔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오빛나와 달리, 언니가 당했다는 소리 한 마디에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화를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오윤나가 장채리와 머리를 쥐어뜯으며 싸우는 모습은 활명수 몇 컵을 들이킨 듯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사기꾼이 꽃뱀을 만나 위장 이혼으로 아내를 쫓아내곤 아이마저 갈취했음에도 그저 우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오빛나. 점 하나 찍고 복수를 꿈꾸는 행동력 따윈 생각할 수도 없었던 너무 착한 엄마 대신 그 사이를 파고들어 아빠의 내연녀를 통쾌하게 골탕 먹인 것은 다름 아닌 빛나의 딸, 연두였다.
아마도 변태식의 카드로 잔뜩 긁어낸 쇼핑백을 한 아름 들고 돌아온 엠마정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는데, 누군가 결혼사진 속 그녀의 얼굴에 잔뜩 낙서를 해놓고 심지어 '못된 마녀'라는 글자까지 적어놓았던 것. 기함한 어른들의 얼굴 다음으로 천진난만하게 잠들어있는 독립투사 연두의 얼굴이라니.
알아서 몰락한 아빠네가 잠잠해진 이후로 한동안은 별 활약이 없었던 연두가 또다시 주요 사건의 키워드가 되게 생겼다. 모든 삶이 거짓이었던 그녀에게 유일한 희망이자 하나뿐인 진실인 강하준(박윤재 분)에게 여자로서 치명적인 모욕을 당하자 채리는 드물게 엄마의 품을 갈구하며 울었다.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려앉은 순간에 그래도 그녀를 안식하게 해줄 유일한 사람은 저주 같은 김 집사의 품뿐이었으니까.
기겁한 두 사람이 어떻게든 말을 돌려보려 했으나 이 아이는 대충 말로 둘러대면 넘어가줄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설프게 아이를 설득하려는 말을 하나하나 부정하며 “아닌데에? 나 분명히 들었는데에?”하고 또박또박 대드는 똑쟁이 연두. 그로기 상태에 빠진 엄마를 대신하여 화가 아저씨, 즉 강하준의 그림을 주겠다며 어르고 달래는 채리에게 홀랑 넘어가 버린 연두는 역시나 어린아이였지만 이대로 그냥 넘어가 줄 꼬마 아가씨가 아님을 잘 안다. 자신의 상처는 돌보지 않고 타인의 아픈 마음만 걱정하느라 내 것인데도 마음껏 가지지 못하는 엄마를 대신해 시청자의 탄산수 역할을 대신해줄 것임을!
"어어, 지금 가지러 갈 거야." 우물쭈물하는 김 집사의 태도와 기가 팍 꺾인 장채리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며 오빛나는 다른 남자와 결혼 약속을 한 엄마를 두고 왜 자꾸 민망하게 강하준을 찾을까 싶어 아이를 달랜다. 그럼에도 입을 다물지 않는 우리의 연두. "아니야! 신경질쟁이 이모랑 약속했어. 근데 엄마, 집사 할머니랑 신경질쟁이 이모랑 엄마-" 다급하게 연두야! 를 외친 장채리. 눈가에 눈물이 맺혀서는 억지로 웃는 입을 만들어 이를 악물고 아이를 달래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연두야, 이모랑 약속했잖아. 착한 어린이는 약속 지키는 거야." "아! 맞다. 히히." 그 말에 천연덕스럽게 쉿! 표시까지 하는 똑쟁이 연두. 오히려 너무 천진난만해서 두려운 그 모습. 다 큰 성인 몇이 달려들어도 막아내지 못하는 모녀 사기단을 어리디 어린 연두의 입으로 함락시켜 버린 것이다.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버럭버럭 호령하는 모습이 어른 못지않다. “신경질쟁이 이모 나빠. 나도 약속 안 지킬 거야.” 아까 그 기세는 어디로 가고 사색이 돼서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이모를 무시한 연두에게 자비란 없다. “엄마, 김 집사 할머니가 신경질쟁이 이모한테 자기가 엄마라고 했어.” 입을 틀어 막혔으면서도 꿋꿋하게 외치는 연두.
이제 모녀 사기단의 흥망성쇠는 이 꼬마 장군의 입에 달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순해 빠진 답답이 여주인공 오빛나더라도 자신을 기만하며 거짓으로 혜택을 누려오고 있었던 그들을 더 이상은 용서치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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