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 집사 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어?! 이게 뭐야. 왜 이런 걸로까지 내 목을 조여오는 거냐구!"
이쯤 되면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집착이라고 해야 할까. 드라마 '빛나는 로맨스'의 악녀 장채리(조안 분). 이 여자의 광기 어린 핏빛 사랑이 날이 갈수록 질척해지고 있다. 권선징악을 주제로 삼은 일일극에서 여주인공을 상대하는 악녀의 아이덴티티가 원래 이런 거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의 오빛나(이진 분) 괴롭히기는 추할 정도로 집요하다.
오빛나의 남자친구, 오빛나의 재능, 오빛나의 커리어. 심지어 그녀의 가족사마저 빼앗고 싶어 하는 극단의 악녀 장채리. 그럼에도 이따금 연민을 느끼는 까닭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거짓으로 살아야 했던 그녀의 그림자 인생이 서글퍼서다. 엄마의 비뚤어진 모성애와 야망으로 점철된 장채리의 인생은 돌이켜보니 오빛나의 그림자를 핥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정한 아버지, 추억마저 아름다운 어머니, 재벌가 손녀가 부럽지 않을 유복한 가정. 게다가 눈앞에 나타난 백마의 왕자님.
억지로 끌려 나간 맞선 자리에서 그녀와 남자 대 여자로 만난 강하준이 잔뜩 싫은 얼굴을 하곤 부모님께 결별 사실을 통보해달라고 하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당당한 자세와 유창한 언변으로 강하준을 압도하는 그 모습은 백치 같은 여주인공 오빛나보다 사랑스러웠었다. 오빛나, 즉 그림자의 진짜 주인인 그녀와 마주치기 전까지 장채리는 비교적 건강한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그게 바로 강하준이 외쳤던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감을 가진 여자, 장채리였던 것이다.
"정말 그 쓰레기 같은 남자가 내 친아빠라는 거야?" 척 보기에도 밑바닥 인생 같은 상스러운 사내가 나의 아버지라니. 평생 고용인 이상의 의미로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그래서 그녀가 종종 보내는 끈끈한 눈빛의 신호마저 이해하지 못했던 김 집사가 나의 어머니라니. 나의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매일. 찬란하게 빛났던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 오빛나라는 존재의 두려움. 그리고 엄마의 간교한 속삭임. 숨통이 조이는 공포와 분노 속에서 그녀는 급기야 정신이 이상해져 버렸다. "그 인간이 내가 김 집사 딸이라는 거 다 들은 거야?" "내가 김 집사 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어?! 이게 뭐야. 왜 이런 걸로까지 내 목을 조여오는 거냐구!"
단순히 캐릭터의 유사성뿐만이 아니라 에피소드 하나가 캔디캔디를 통째로 닮은 내용이 등장하기도 했다. 촬영 도중 강하준의 주변에서 조명 폭발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를 대신하여 떨어진 조명을 맞은 채리는 실명 소동을 일으키며 잠시 동안이라도 강하준을 가질 수 있었다.
‘나보다 그녀가 더 그를 사랑하지는 않을까?’라는 번민 속에 끝내 강하준을 놓아버린 오빛나와, 죄책감에 장채리를 아내로 받아들인 강하준은 스잔나를 경외하는 캔디와 테리우스였다. 만화 캔디캔디에서 스잔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리허설 도중 테리우스를 대신하여 조명을 맞는다. 실명한 장채리처럼 불구가 되어버린 스잔나를 역시 죄책감으로 버릴 수 없었던 테리우스는 사랑하는 캔디를 떠나보내고 스잔나의 남자가 되어야만 했었다. 많은 이들에게 분노의 에피소드로 남아있는 이 이야기가 2014년 한국의 드라마에서 모녀 사기단의 ‘실명 조작 사건’으로 마무리되었으니 80년대 순정만화의 저주를 끊어낸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김 집사가 내 엄마라는 사실이야. 알아?" "내 이름 부르지도 마. 과거에 얼마나 놀았으면 그런 쓰레기가 내 아버지야?" 그만 내 것이면 돼. 그만 내 것이면. 아버지를 잃고 20년간의 삶을 부정당한 장채리에게 이제 남은 유일한 희망은 ‘강하준’이라는 존재뿐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처음에는 그저 조건 좋은 남자이자 인생의 비전에 불과했던 강하준을 향한 마음이 모든 것을 잃고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닌 지금에서야 진정한 사랑으로 성장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파국의 지름길인 강하준과 이 미친 사랑을 놓지 못하는 까닭은 강하준을 갖지 못했던 그 순간이 그녀를 그림자 인생으로 만든 시작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빛나를 선택한 이 남자가 내게 준 균열. 그 순간을 되잡고 싶은 마음. 그녀의 미친 사랑에 침을 뱉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가여움을 느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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