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희의 대표작은 2002년 방송됐던 <인어아가씨>다. 아직도 극중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 은아리영이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캐릭터 자체가 무척이나 강렬하고 자극적이었다. 한을 품고 덤벼든 처절한 복수,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연약한 여인. 장서희는 은아리영에 철저하게 빙의되었고, 수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며 격한 응원과 사랑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반짝하기만 했던 하이틴 스타 이미지를 단숨에 부숴버렸고, MBC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지지부진했던 배우 생활에 탄탄대로가 열리는 듯했으며, 적어도 몇 년간은 인기 드라마의 주연 배우로서 존재감을 떨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어아가씨> 이후로 그녀의 연기가 돋보였던 작품은 좀처럼 나타나질 않았다.

2003년 <회전목마>, 2005년 <사랑찬가>에서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쳐 보였지만 시청자들에게 어필될 만큼은 아니었다. 워낙 거셌던 은아리영이라는 캐릭터의 잔상이 장서희에게 여전히 남아있었던 탓이기도 했고, 어울리지 않은 캐릭터를 가까스로 입은 채 소화하려 무던히 애쓴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 탓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2008년 또 한번 제 몸에 딱 들어맞는 옷을 입게 된다. 막장드라마의 대표작으로 불린 <아내의 유혹>에서의 구은재 역할이다. 얼굴에 점 하나를 찍은 것으로 변신에 성공한 구은재.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처참하게 인생을 짓밟았던 전 남편과 그의 새로운 여자에게 무시무시한 복수의 칼날을 들이대고, 시청자는 구은재를 통해 다시금 통쾌함을 맛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로서 <아내의 유혹>은 장서희에게 <인어아가씨>를 잇는 두 번째 대표작이 되고 만다.

그 후 그녀는 잠시 한국을 떠나 중국에서 활동을 펼친다. <인어아가씨>와 <아내의 유혹>이 중국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누리게 되자, 아예 그녀에게 러브콜을 보내 중국드라마의 주연배우로 삼아버린 것이다. 중국에서의 장서희의 인기는 선풍적이었다. 한류 열풍이라는 말에 걸맞을 만큼의 위력을 뽐냈다. 그녀의 중국 진출은 성공적이었고, 보다 넓은 무대로 배우 활동을 펼친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한 일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이는 그만큼 국내에서의 복귀가 힘들어진다는 얘기도 됐다. 장서희는 송혜교나 전지현이 한류열풍의 주인공이 된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국내에서 완벽한 탑클래스 위치를 확보한 상태에서 해외로 방향을 튼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복귀작 선정에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인어아가씨>와 <아내의 유혹>, 단 두 작품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던 그녀로서는 더욱이 말이다.

그녀에게 ‘복수의 화신’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대상이라는 큰 상을 쥐어주고, 연기력을 인정해 주며, 스타의 자리에 올려놓은 일등공신이 그녀가 맡았던 복수의 여인 은아리영과 구은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장서희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한 복귀작 선정에 이를 염두에 두었을 테다. 그래서 6년 만에 안방극장으로 돌아온 그녀가 선택한 작품이 어제 첫 방송을 시작한 KBS2 일일극 <뻐꾸기 둥지>다.

<뻐꾸기 둥지> 역시 복수극이다. 작품 소개를 보면 ‘한 여인이 자신의 오빠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오빠의 연인의 대리모가 되어 수정란으로 임신해 낳은 아기를 키우게 한 뒤, 그 아이를 다시 빼앗음으로써 여자를 파멸시킨다는 정통 멜로 복수극’이라고 적혀있다. 장서희에게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제격인 작품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가 맡은 역할은 복수의 화신이 아니라 복수의 희생양이다.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다시 빼앗아 복수하는 이화영 역할은 배우 이채영이 맡았고, 장서희가 맡은 백연희라는 캐릭터는 아이를 빼앗김으로 인해 고통을 겪게 되는 역할이다. 장서희는 복수극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복수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편에 서서 연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첫 회에서 그녀의 연기는 별다른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일일극의 생리와 흐름을 잘 파악하고 있는 여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앞으로 작품을 잘 이끌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조금은 달라진 얼굴이 어색함을 느끼게 했지만, 오랜만에 그녀를 보게 된 반가움이 이내 그 어색함을 덮어버렸다.

그동안 장서희가 맡아온 캐릭터를 놓고 봤을 때 백연희와 이화영을 연기하는 배우들이 서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오빠를 죽인 원수를 향해 독기를 품고 웃는 얼굴로 접근해 잔인한 파멸을 일으키는 역할에 장서희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또 어디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장서희는 그 역할을 이채영에게 내줬다.

왜 그녀는 복수의 화신 역할을 마다했을까? 왜 반대로 복수의 희생양 역할을 선택했을까? 아마도 장서희는 복수극 안에서의 연기 변화를 시도하고픈지도 모른다. <인어아가씨>와 <아내의 유혹>에 이어 또 다시 복수의 아이콘이 된다면 그야말로 하나의 이미지로 굳혀지고 말 테니까. 배우에게 고착화된 이미지만큼 치명적인 독이 없다는 것을 그녀도 익히 잘 알고 있을 테다.

‘복수의 화신’으로 자신이 성장했던 것처럼 후배 배우를 키우고 싶은 선배의 배려가 깃들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채영 역시 확실하게 뜬 배우가 아니다. 시청자들에게 아직은 낯선 조연배우에 불과하다. 장서희는 이제 자신이 아닌 될 성 싶은 나무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역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12년 전 그토록 간절했던 자신의 연기 욕심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뻐꾸기 둥지>는 예고편부터 장서희를 전면적으로 내세워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다시금 ‘복수의 화신’으로 되돌아 온 듯이. 그러나 이 작품의 실제 주인공은 장서희가 아닌 이채영이다. 이채영의 핏빛 복수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끌 예정이다. 장서희는 그녀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뿐이다. 그녀에게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그래도 변함없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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