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출연했던 작품 목록, 즉 필모그래피는 그간 어떤 활동을 해왔는가를 증명하는 명예로운 훈장과도 같습니다. 이를테면 자격증 같은 것이죠. 그가 어떤 작품에 출연해서 얼마만큼의 감동을 주었는가. 그게 곧 연기자를 향한 대중의 신뢰일 테니까요. 비단 연기자뿐만이 아니라 제법 드라마 좀 본다 하는 사람은 제작진이 누군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게 됩니다. 특히 소위 '작가놀음'이라 불릴 만큼 이야기의 힘이 막강한 안방극장에서 작가의 경력이란 좋은 드라마를 선별하는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경력이나 필모그래피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 또한 있죠. 바로 드라마 엔젤아이즈의 주연 배우 구혜선과 작가 윤지련이 그러했습니다.

윤지련 작가와 구혜선의 결합은 이번이 첫 만남이 아닙니다. 그녀들은 이미 5년 전,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첫 번째 호흡을 맞춘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엔젤아이즈는 크게 흥행했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주요 거물이 오랜만에 손을 맞잡은 기대작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윤지련과 구혜선이라는 이름의 조합에 기대감이 아닌, 도리어 그 반대의 감정이 들었던 것은 왜였을까요.

분명 꽃보다 남자는 2009년 최고의 흥행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시청자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원작 만화의 무시할 수 없을 영향력과 신성 이민호의 활약에 바친 영광일 뿐, 정작 작품의 메시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여주인공 금잔디(구혜선 분)에게 쏟아진 세간의 평은 비난의 돌팔매질뿐이었습니다. 저 또한 화난 대중의 일부였다고 밝히고 싶네요.

호평받은 오리지널, 그리고 차례차례 리메이크된 일본과 대만의 꽃보다 남자. 유행 지나고 발목 잡는 데 일가견이 있는 대한민국의 미디어가 세 번째의 꽃보다 남자를 만들어놨을 때 나름 원작의 팬인 제가 무엇보다 경악했던 것은 그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츠쿠시(한국판 금잔디)를 어쩜 이다지도 밉살스럽게 변질시켜 놓았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만화처럼 어여쁜 구혜선 덕분에 아시아 삼국 중 미모만큼은 월등하리라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건만 그것마저도 구혜선은 가난한 여고생이라는 설정에 어울리지 않는, 소위 얼짱 메이크업으로 빛을 가렸죠.

그저 못하는 연기라고 말하기엔 아쉬운, 기괴하고 이상한 표현력으로 시청자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 구혜선의 연기는 그녀의 스타일링만큼이나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 듯해서 거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생활력 강한, 건강하고 발랄하며 사랑스러운 츠쿠시의 이미지를 구혜선은 억척스러운 망나니로 해석해 버렸더군요. 특히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과 우악스럽게 집어삼키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 마치 폭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밀어 넣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지경이었습니다.

일본의 이노우에 마오, 대만의 서희원과 달리 한국판 츠쿠시의 구혜선이 호평받지 못했던 까닭은 비단 구혜선의 연기뿐만이 아니라 이 캐릭터를 대단히 잘못 해석한 듯한 윤지련 작가의 필력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만화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이야기라지만 공감대를 상실한 대사와 뭉그러진 감정 묘사는 시청자로 하여금 불만을 야기하기에 충분했죠. 그 와중에 기절초풍했던 것도 모자라 작가의 사회 경험을 의심하게끔 했던 대사가 하나 있는데, 가난한 고학생 신분 탓에 죽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금잔디가 한 달도 채우지 못했을 짧은 경력에 200만 원의 가불을 요구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던 성실한 츠쿠시를 어쩜 이렇게 이상한 아이로 변질시킬 수 있을까 싶더군요.

결국, 그녀들의 필모그래피는 두터운 편견이자 명예롭지 않은 주홍글씨였죠. 학원물이라는 장르에서 이례적인 시청률을 달성한 화려한 필모그래피의 설명조차 그저 편견 앞에선 허울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윤지련 작가와 구혜선이 다시 만났으니 시청자는 외면할 수밖에요. 엔젤아이즈 첫 회 시청률이 불과 6퍼센트였다는 사실 또한 시청자의 선입견을 그대로 드러내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설이 길었지만, 이 리뷰의 끝은 새드엔딩이 아닙니다.

이토록 큰 선입견과 불신을 안고 있었으면서도 굳이 엔젤아이즈를 시청하게 된 까닭은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편견의 눈을 이겨낸 ‘입소문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배우로서나 작가로서나 그리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데다 대체로 ‘불호’인 두 사람의 재회를 시청자들은 초반 불신했지만, 날이 갈수록 이 드라마를 향한 대중의 찬사는 커지고 있었습니다.

각종 커뮤니티에서 이 드라마 재미있더라며 소곤소곤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엔젤아이즈는 한 자릿수의 시청률을 영차영차 끌어올려 매회 최고 시청률을 달성했습니다. 최근 위축된 성적 탓에 아쉽게도 동 시간대 ‘호텔킹’에게 그 자리를 뺏겨버렸지만, 한동안 엔젤아이즈는 주말극 1위의 자리를 사수하는 프로그램이었죠.

더군다나 이젠 이쯤 하면 더 이상 시청률에 구애받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 보기 드물게 작가와 구혜선에 쏟아진 신뢰와 찬사는 시청률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비로소 윤지련 작가의 세계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고 드디어 구혜선의 연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니까요.

엔젤아이즈는 그 제목만큼이나 투명하게 빛나는 순정만화 같은 드라마입니다. 유리알처럼 섬세한 감수성과 서글픔이 서려 있는 이야기가 애틋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죠. 사고로 눈을 잃은 여주인공에게 전해진 천사의 눈동자. 그러나 엔젤아이즈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이면엔 인간의 추악한 이기심과 누군가의 잔혹한 희생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딸에게 빛을 주고 싶어 환자의 호흡기를 떼어낸 아버지. 그렇게 갖게 된 천사의 눈동자는 바로 여주인공 수완(구혜선 분)이 훗날 사랑을 나누게 될 남주인공, 동주(이상윤 분)의 어머니 유정화(김여진 분)의 희생이었습니다.

엔젤아이즈를 보면서 놀랐던 것은 작가 윤지련과 배우 구혜선의 성장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윤지련 작가가 이토록 큰 인간애를 이야기에 녹여낼 수 있는 사람인지를 미처 몰랐었어요. 그건 남녀주인공이 공통적으로 ‘정화 씨’라 부르는 유정화의 큰 사랑에서 비롯된답니다. 수완이 정화 씨에게 받은 빛. 윤재범(정진영 분)이 동주에게 전한 죄책감의 크기를 넘어선 사랑. 피 보다 간절한 유사 가족의 애끓는 관계들. 윤지련 작가의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일면이었습니다.

꽃보다 남자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의 섬세함과 희생을 그려내는 윤지련 작가가 이토록 큰 성장을 한 것처럼, 금잔디 또한 껑충 뛰어 어른이 되었습니다. 세밀하고 여린 감성을 요구하는 이 드라마의 순정 만화 감수성에 절대 기준이 되어주고 있는 그녀이지요. 그녀는 이제 우악스럽게 오버 액션을 담당하지도 거북한 표정을 지어 시청자를 질리게 하지도 않습니다. 연기에 여백이 생겼고 감정에 여유가 남았습니다.

이제 시청자는 구혜선의 연기를 보며 상념에 젖기도 하고 가슴을 절절하게 하는 서정성에 깊은 여운을 음미하기도 합니다. 특히 내게 빛을 내린 천사가 다름 아닌 남주인공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화 씨였어. 정화 씨였어. 정화 씨였어.”를 되풀이하며 목이 메 우는 그 모습엔 죄책감과 깊은 감동이 동시에 느껴지는 놀라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첫인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 반드시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긴 선입견에만 묶여있었다면 윤지련과 구혜선의 이토록 성공적인 재회에 감격할 수는 없었을 테죠. 이미 시작이 절반 이상이었던 ‘꽃보다 남자’보다 오리지널로 창조한 두 사람의 세계관이 오히려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순정만화의 감수성을, 그 진가를 여실히 깨달을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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