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 정신을 가진 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익숙한 것을 선호하고 변화를 기피하는 이라 할지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권태’다. 제아무리 좋은 신상을 갖는다 해도 새로운 상품을 가졌을 때의 기쁨과 희열은 잠깐이요, 한 달 이상 가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손만 잡아도 백만 볼트 전기가 흐르는 것만 같은, 제아무리 열정적인 연인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권태는 찾아오게 마련이다. 제아무리 좋은 신상이나 연인이라 해도 권태를 피할 뾰족한 방도는 없을 듯하다.

영화 <차가운 장미>에서 잘 나가는 신경외과 의사 폴(다니엘 오떼유 분)에게 찾아온 위기는 신용불량과 같은 경제적인 위기나 배우자의 불륜과 같은 부부 사이의 위기가 아니다. 바로 ‘권태’다. 익숙한 것에서 더 이상 새로움을 찾을 수 없을 때 밀려드는 권태는 사람의 무의식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새로움을 갈망하는 욕구를 만든다. 폴에게 밀려든 권태라는 위기는 새로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발전한다.

하나 더, 폴은 외과적인 수술은 잘 할지언정 인간관계는 수술 실력만큼 매끈하지는 못한 듯하다. 은행원 아들과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고, 절친한 친구 제라드(리샤드 베리 분)에게 찾아온 환자의 신상을 캐묻다가 싸우기도 하니, 소통에 익숙하기보다는 서툴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듯한 사내다.

이런 폴에게 한 줄기 빛이 찾아든다. 폴을 향해 매일 장미꽃이 배달되는 것, 처음에는 환자가 놓고 간 꽃인 줄 알았지만 지극정성으로 날이면 날마다 배달된다. 누가 자신에게 장미를 배달하는 건가를 놓고 궁금해 하던 폴은 자신에게 장미를 배달하는 사람을 루(레일라 벡터 분)로 지목하고는 꽃집에서 루를 닦달한다. 인간관계에 있어 서툴다 보니 조용한 어조로 왜 자신에게 꽃을 보냈느냐를 루에게 묻지 않고 화난 어조로 밀어붙이다 보니, 폴이 루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루는 폴이 겪는 권태라는 고질병을 극복할 단비 같은 존재로 바뀐다.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흔히 보는, 앙숙 관계에 있는 남녀가 친구에서 마지막에는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루에게 으르렁대던 폴은 루에게 호감을 느끼고 다가서기 시작한다. 이야기 전개가 권태라는 일상의 삭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낯선 타인, 루를 찾는다는 수순에 머무른다면 <차가운 장미>는 그저 그런 불륜 통속극에 지나지 않겠지만 <차가운 장미>는 심리학을 공부하는 이라면 ‘확증 편향’ 혹은 ‘믿음 보전 편향’을 되새김할 수 있는 프랑스 영화다.

확증 편향 복은 믿음 보전 편향은, 자신의 믿음과는 위배되는 확실한 증거가 물리적으로 있음에도 물리적인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이중적인 심리를 표현하는 심리학적 용어이다. <차가운 장미>는 인간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는 확증 편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영화다. 폴이 진정으로 보고 싶어 했던 건 권태로운 인상을 벗어나게 만들어줄 단비 같은 존재지, 영화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차가운 장미>는 반전 영화 같아 보이지 않는 영화임에도 후반부에 들어서서는 반전을 보여준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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