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 못해 지난한 시간이었다. 길환영 사장 해임 제청안을 의결하기 위해 28일 오후 4시 열린 KBS이사회는 끝날 줄 몰랐다. 29일 자정을 넘겨서야 ‘내달 5일로 해임 제청안 의결을 연기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청와대의 지시를 수행하며 KBS 보도 독립성을 침해해, KBS 구성원들과 정면대치하고 있는 길환영 사장의 운명이 갈리는 자리라는 점에서 28일 이사회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장장 9시간 동안 진행된 ‘마라톤 회의’는 쉬이 종잡을 수 없었다. 시시각각 양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 28일 오후 4시 열린 정기 이사회에서 길환영 KBS 사장 해임 제청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KBS이사회 (사진=28일자 KBS 뉴스9 캡처)

이사회 참석 이사에게 가장 먼저 받은 연락은 ‘가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었다. 오후 6시 16분, 여당 추천이사들이 길환영 사장 해임 제청안의 제안사유가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 여야 이사들끼리 2시간 가까이 객관성 시비를 벌인 끝에 사유확정 절차에 들어갔다. 야당이사들은 여당이사들의 지적을 수용해 현장에서 즉시 단어를 보완했고, 이사회에 불참한 길환영 사장에게 다시 소명 기회를 통보했다. 야당이사들은 길 사장의 등장과 관계없이 표결을 요구할 계획이라는 입장이었다.

오후 6시 40분 경, 한 야당이사와의 통화에서 여야 이사들이 합의해 오후 7시 30분 정도에 표결할 것 같다고 들었다. 그러나 꽤 오랫동안, 4시간 가까이 좀처럼 대화가 진전되지 못한 채 진공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오후 11시 36분 경 표결 처리 여부는 ‘미정’이었으나 29일 0시 8분이 되자 ‘연기되는 것 같다’는 데 무게중심이 쏠렸다. 표결연기를 두고 공방 중일 때에는 이사회 초반과 달리 여당이사들이 표결 처리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을 야당이사들이 연기하는 방향으로 틀려고 했다는 ‘예상치 못한’ 답이 왔다. 결론은 6·4 지방선거 다음날인 내달 5일에 의결한다는 것이었다.

표결에 대한 입장이 왔다갔다 할 만큼 변화무쌍했던, 9시간 회의의 자초지종이 궁금했다. <미디어스>는 29일 1시 10분 경 야당이사 4인을 만나 ‘28일~29일 이사회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들어 보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문.

미디어스(이하 미) : 오늘 이사회 결과에 대해 간략한 설명 부탁한다.

야당이사들(이하 야) : 오늘 합의한 바는 다음과 같다. "(길환영 사장 해임 제청안을) 6월 5일 4시로 연기해 처리한다. 이사회가 노사 양측 상대로 중재 노력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이다.

미 : 이런 합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야 : 최후발언들을 하면서 표가 5:5 정도로 갈리는 상황이었다. 이길영 이사장은 가결이든 부결이든 어느 한 쪽 편에 서는 모습이 되기 때문에 연기를 하자며 ‘긴급동의’를 제안했다. 이사들은 그 제안에 갑론을박을 벌이다 마지막에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미 : 6월 5일에 처리하는 게 오늘(29일) 처리하는 것보다 결과가 나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인가.

야 : 잘한 건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다. 최후진술하면서 5:5로 되는 분위기였는데, 그 상황에서 표결했으면 (가결이) 안 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노사 양측을 상대로 이사회가 좀 더 최선을 다해 중재할 수 있는 시간을 갖자는 데 뜻이 모아졌다. 이사회 의결 전에 (간담회 등을 통해) 사장도 만나고 노조도 만나고 하면서 중재에 노력하자고.

미 : 최후진술 이후 5:5로 갈렸다고 하는데, 여당이사 쪽에서 누가 돌아섰는지까지는 알 수 없나.

야 : 5:5라고 추정하는 건, (여당이사들이 하는) 발언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논의하는 톤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누구라고 얘기하는 건 대단히 부적절할 수 있다. 이후 표결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누구라고 단정을 해 버리면 그 사람의 입지가 좁아지고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다.

미 : 여야 이사들이 표결 연기에 합의한 이유는.

야 : 한마디로 양쪽 다 가부를 확신할 수 없어서 결국 연기에 합의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여야 모두 오늘 표결처리하자는 입장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입장이 밀렸다. 그렇게 된 판단들에는 서로 차이가 있었지만. 이사회가 당장 표결할 때의 부담은, 노사 갈등 상황에서 이후에 더 이상 중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가결이든 부결이든 결과가 나오면 한쪽 편을 들어주게 되니까. 그렇게 되면 이사회가 완전히 무력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길영 이사장도 마찬가지의 생각이었다.

여당 측은 7:4가 나올 것 같았으면 표결하자고 했을 텐데 그쪽도 확신이 없었다. 우리도 6:5로 가결된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밀어붙였을 텐데 오늘 판단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5:5로 갈리니, 누구도 가결/부결을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이사장이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중요해지는데, 이때 이사장이 ‘연기 카드’를 던진 것이다. 여야 모두 안 받을 수 없는 패였다.

미 : 야당이사들이 낸 해임 제청안 제안사유의 객관성 시비 때문에 초반 회의가 길어진 것으로 안다.

야 : 1번 사유가 ‘보도통제’ 의혹 확산에 따른 공사의 공공성과 공신력 훼손이었는데 여당 측이 제안사유에서는 빼고 해임 제청안을 내게 된 배경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했다. 또 2, 3, 4번 사유도 수정하자는 요구가 있었다.

제안사유 건건에 대해 문제제기가 들어왔다고 보면 된다. △‘보도통제’ 의혹 확산에 따른 공사의 공공성과 공신력 훼손 △공사 사장으로서 직무 수행능력 상실 △부실한 재난보도와 공공서비스 축소에 대한 책임 △공사 경영실패와 재원위기 가속화에 대한 책임 4가지가 해임 제청 사유였다. 여당 쪽에서 1번 사유가 말이 안 된다는 사람이 3명, 2~3번은 부수적인 사항이니 사유에서 빼는 게 맞다는 사람이 있었고 4번은 추가됐으니 논의하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당이사들이 제안사유가 추가됐으니 소명기회를 또 줘야 한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시간이 또 많이 갔다. 사장에게 언제까지 답을 받을 거냐, 사장이 답을 안 하면 그 뒤엔 어떻게 할 거냐 등등으로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나마 여야 이사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했던 건 사장의 리더십과 조직에 대한 대표로서의 능력이 상실됐다는 부분이었다. 그럼 이 부분 하나만을 가지고 안건을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길어졌다. 또 여당이사들은 ‘길환영 사장의 리더십 상실’에 동의한다고는 하지만, 표결에서 우리에게 동의해 줄지는 다른 문제였다. 서로 계산하는 과정이 길어져 정회가 잦았던 것이다.

미 : 길환영 사장은 이번에도 이사회에 불출석했다는데.

야 : 길환영 사장을 5월에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오늘도 소명하라고 했는데 사장이 안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3번의 임시 이사회가 있었는데 한 번도 안 왔고. 지난 월요일(26일)에는 자기 해명을 담은 소명서를 냈지만 내용이 담화문 축소판이었다.

미 : 아까 말했던 ‘중재’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하다.

야 : 사장에게는 노조가 파업을 하니 당신이 결단하라고 할 수 있고, 노조에게는 파업을 이사회가 마거나 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KBS에 타격이 덜 가는 방향으로 (파업을) 진행할 수 없느냐 제안하는 등 조직 전체를 보호하자는 방향이다. 될 가능성이 높지는 않지만 여튼 이사회가 중재에 나서보자는 것이다.

미 : 결과적으로 당장 표결을 하는 것보다는 6월 5일 표결을 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에서 연기했다는 것인가.

야 : 9시간 회의한 것에 비해 소득이 너무 없는 게 사실이다. 처음에는 가결될 희망을 가지고 표결하자고 몰아붙였지만, 뒤로 갈수록 오늘은 승산이 없어보인다, 오늘 표결을 했으면 부결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었다. 부결되면 KBS 내부 구성원들을 ‘진압한다’는 것이 저쪽의 입장이었다. 이사회에서 길 사장 해임 제청안이 부결되면 그걸 ‘신임’으로 받아들여, (파업에 들어간 양대 노조를) 진압한다… 이런 식.

우리도 가결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밀고 갔을 텐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사회는 완전히 무력화된다. (부결되고 나서) 야당이사들이 해임 제청안을 또 낸다고 해도 상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여당이사들이 상정을 거부해 버리거나, 이사회를 소집해도 여당이사들이 안 나와서 의사정족수 6명을 못 채워 무산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후에 이사회가 할 수 있는 노력이라는 게 사실상 소송밖에 남지 않은 것. 소송은 각하될 수도 있고 결과를 기다린다 해도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6월 5일이라도 가결처리가 된다면… 우리는 그 가능성을 일단 믿어봐야 되는 거니까. 이사회의 공통된 입장은 이 문제의 출혈을 최소화시켜 해결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미 : 일단 지방선거는 끝내자는 생각에서, 단순히 부결되는 시점만 늦춰진 것은 아닐까.

야 : 그럴 가능성이 크다. 야당이사들 내부에서도 그때 부결되느니 오늘 부결되는 게 낫다는 의견이 있었다. 애초에 아무 가능성이 없으면 당일 처리를 강력히 주장했을 텐데 계속해서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한 두 사람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믿어볼 수밖에… 여당이사들도 나름의 전략이 있지 않겠나. 서로 동상이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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