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비통함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비통함이란 표현이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그 날 저녁의 악몽 같았던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차라리 보지 말 것을, 차라리 듣지 말 것을 그랬다. 동료들은 옷이 찢긴 채 울부짖었다. 최루액이 난무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엄숙해야 할 장례식장은 경찰의 폭력 앞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했던가. 하지만 한 노동자가 삶을 마감한 날은 존엄도, 추모도, 애도도 없었다. 짐승처럼 야만에 불을 켠 경찰의 폭력만이 있었다. 절대 사람이 할 수 없는 짓이라 생각했다. 사람이기에 그래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그래서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이야기 하려한다. 그 날의 비통함을, 그리고 공권력이 보여준 패륜과 잔인함을 말이다.

지난 5월 17일 삼성서비스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4살의 젊은 노동자는 무엇이 그리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가족에게, 그리고 서비스 노동조합에 유서를 남겼다.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을 보지 못하겠기에 먼저 떠난다고, 그리고 꼭 승리해달라고. 자신의 시신을 찾게 되면 지회가 승리하는 날 안치해 달라고. 그리고 아버님의 병원비 때문에 고통 받는 동료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는 자신의 행동이 나쁜 행동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이 더 좋아진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면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라고, 노동조합의 싸움이 이기면 그때 장례를 치러달라고 당부했다.

생에 마지막 선택을 하며 꾹꾹 눌러쓴 글에는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달라는 절규가 담겨있었다. 차라리 원망이라면 괜찮았을 것을, 차라리 그저 편하게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면 괜찮았을 것을, 꼭 승리해달라고, 그때 장례를 치러달라는 말 한마디에 동료들은 목이 멨다.

착하기만 했던 34살의 노동자. 그의 이름은 염호석이다. 대기업 삼성에서 일한다는 그는 그저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순순히 일만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성수기 하루 12시간을 일해 모은 돈으로 비수기를 살았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임금, 바지사장의 모욕을 참아내며 살아야했다. 삼성에서 서비스 수리를 하는 노동자는 모두 그와 같은 처지였다. 그 삶의 벼랑 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한 달에 30만원을 받아도, 40만원을 받아도 나아질 꺼라 생각했다. 노동조합을 하기 전에는 그보다 더 한 악몽이었으니 말이다.

삼성서비스에서 노동조합을 만든 후 3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한명은 과로사, 또 한명은 자살이었다. 죽을 만큼 일해서 결국엔 과로로 죽고, 죽을 만큼 일해도 유서엔 ‘허기진다’는 말을 남기고 죽고. 대기업 삼성마크가 달린 옷을 입고, 삼성의 명함을 들고 다녔지만, 그들에게 삼성은 허울 좋은 껍데기일 뿐이었다. 노동조합을 인정하기 싫어 경총에게 교섭을 위임하고, 뒷짐을 지고 있는 상전일 뿐이었다. 좀 더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외침을 외면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곳. 그 삼성이 노동자에게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삼성이 사람의 귀함을 아는 곳이었더라면, 삼성이 무노조라는 경영이념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젊은 노동자들이 생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했으면 좋으련만 경찰은 염호석의 시신을 장례식장에서 탈취해갔다. 노동조합에서 장례를 치루고 싶다고 고인의 아버님을 설득하는 사이 경찰은 들이닥쳤다. 유신시대, 독재정권에서 일어났다던 일들이 2014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경찰이 들이닥친 이유는 고인의 아버지가 시신인도요청을 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왜 왔냐는 동료와 조문객들의 물음에 경찰은 대답 대신 최루액을 살포하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조문객과 동료들은 불법시위를 하는 것도, 범죄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왜 경찰이 들이닥친 것인지 이유를 알려달라고, 고인의 유언대로 해달라는 요청을 하는 중이었다. 대화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 20일 경찰이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센터 분회장 고 염호석 씨의 시신을, 고인과 가족의 뜻을 무시한 채 탈취하려는 과정에서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노조원들과 마찰을 빚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경찰은 채증 카메라를 눌러대고, 최루액을 난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고인의 아버지가 경찰 병력 철수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동료들과 조문객들을 짓밟았다. 그리고 27명을 연행했다.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준비된 것처럼 경찰은 진압과 폭력, 연행을 멈추지 않았다. 뭔가 한편의 작전을 보는 것처럼 치밀했다. 만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일 밀양의 한 화장터에서 경찰은 고인의 친모와 동료들에게 최루액을 난사하고, 유골함을 빼돌렸다. 해 뜨는 정동진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그 말 한마디 지켜주고 싶어서, 유골함을 돌려달라는 요청을 경찰은 또 다시 폭력으로 짓밟은 것이다. 고인의 친모에게도 최루액을 뿌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 이것이 인간이 할 짓인가. 그리고 국가의 권력을 대신 행한다는 공권력이 할 짓인가. 이것은 무언가가 잘 못되었다는 생각 밖에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패륜이 일어났다는 것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패륜을 행한 게 공권력이라는 것.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한 슬픔과 아픔…. 더 말로 쓰기 어려운 마음이다.

공권력은 사회 안전을 위한 필요최소한에서 행해져야 한다. 하지만 이번 시신과 유골함 탈취 에서보면 과연 이것이 사회 안전을 위해 공권력이 수행해야 하는 일인가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이것이 과연 공권력의 독자적인 판단인 것인지, 이 죽음의 확산을 두려워하는 누군가에 의해 하달 받아 행하여진 것인지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범죄다. 한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잔인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추모하고, 애도해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권리다. 그 권리마저 폭력으로 진압한다는 것은 인륜을 저버린 행위다. 독재유신 정권에서 행해지던 시신탈취의 과거가 2014년 되살아왔다. 그것은 바로 이 정부가 그 독재, 유신과 하등 다른 것이 없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일부 경제지라는 곳에서는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시신으로 싸움을 한다는 헛소리를 한다. 당신들이 아는가.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잔인하게 번뜩이는 공권력을 보았다. 고인의 마지막을 지키려는 동료들과 조문객의 울부짖음을 보았다. 동료들에게 고인의 마지막을 지킬 시간이라도 주었는가. 같이 아파할 시간, 같이 슬퍼할 기회라도 주었는가. 그 기회마저 박탈해버린 채 폭력을 행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법집행이고, 질서인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써내려가는 그 글들. 한 사람의 죽음을 왜곡하지 마라. 그것은 언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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