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좀 줄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요즘엔 그동안 잘 못했던 ‘거절’이라는 걸 제법 얼굴에 철판깔고 시도해본다. 그런데 고작 거절의 의사가 “고마운데요, 제가 좀 어려운 처지라서 다른 분 찾아보시고요, 그래도 제가 꼭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죠 뭐……” 이런 식이니 이건 거절도 아니고 수락도 아닌 모호한 상태다. 그래도 내 성격을 아는 기자들은 내가 이 정도까지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배려해서 철회하거나 다른 사람 추천을 부탁하기도 한다.

▲ 송풍초등학교 윤일호 선생님과 6학년 학생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6개월 전 새전북신문의 청탁을 거절하지 못한 건 <삶과 여유>라는 그 코너 제목이 맘에 들어서였다. 삶을 여유있게 살고자 하는 것은 선망하는 일이고 나 역시 각박한 삶 속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혹은 한줄기 맑은 바람 같은 여유찾기가 내 전공(?)이라 할 정도로 주제에 대한 ‘필’이 확 왔다. 한 서너달은 그럭저럭 <삶에서 여유>를 찾아 정리가 되었는데 문제는 그 후부터 글을 써야겠다는 의지가 팍 꺾여버린 것이다. 고단하나마 <삶>은 계속되고 있었으되 <여유>를 찾을 수 없는 물리적 심리적 상태가 압박으로 다가왔다. 내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싶어서 반성도 하고 스스로 독려도 해보았으나 고사한 여유의 싹은 도저히 회생시킬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방송장비 보호 때문에 에어컨 팍팍 돌아가는 방송국에서 여름 한철 <피서(避暑)>는 잘 했는데 이로 인한 일상 생활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체득하지 못해 <피서(避書)>가 되어버렸다고 반성문 비슷하게 써놓고 고정 필진의 6개월 책임을 겨우 벗었다. 생생한 경험과 쉼없는 글 쓰기야 말로 글감의 원천이 되는 것, 피서(避書)는 정말 피해야 할 일이라고 거듭 다짐하면서…….

이런 때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취재다. 취재를 다니면 스튜디오에서 앉아있을 때보다 고생스럽지만 삶의 공부가 된다. 최근에 지역희망찾기와 대안을 주제로 특집방송 취재를 다니면서 숙연해지는 체험을 했다. 전교생 20여명, 6학년 4명인 산골학교에 자원해서 산골 아이들과 열린 교육을 실천하는 진안 용담 송풍초등학교 윤일호 선생님을 인터뷰하면서 지난해 발간한 학급 문집을 선물로 받았다. 표지부터 시작해 전체가 아이들과 선생님 손글씨로 만들어진 책은 매우 정감있었다. 선생님은 딱 세 권 남은 거라며 희귀성을 거듭 강조했다. 방학 중임에도 불구하고 윤일호 선생님과 그 반 아이들은 전날 구봉산을 다녀온 데 이어 그날은 학교에 나와 비디오를 시청하고 있었다. 이 학교 6학년 민진홍 학생이 지난해에 썼다는 글이 눈에 확 들어왔다.

개자식

밤에 엄마 심부름을 가는데
학교 쪽에서 어떤 검은색
좋은 차가 찻길로 가는
얼룩진 강아지를
못 보고 쳤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를 뻔 했다.
그 아저씨는 차에서 내려
“에잇 씨발 퉷!!”
하며 침을 뱉고 갔다.
'저런 개자식 짐승보다 못한 놈’
나는 밤이라 개를 묻어주지도 못하고
그냥 왔다.
강아지가 죽은 것을 보고도
안 묻어준 내가 더 나쁜 놈 같이
느껴진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고 흉내로 되는 것도 아니다. 가슴으로 쓰는 것이지 재주를 가지고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윤일홍 선생님의 설명이 뒷받침하듯 구절 구절 가슴에 스미는 것이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진홍이는 집에서 개도 키우고 닭도 키워봐서 생명의 소중함을 잘 아는 아이다. 그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좋은 차의 아저씨가 한없이 ‘야속’했다고 한다.

한번 읊어주면 ‘짐승보다 못한’ ‘개자식’같은 어른들 사이에서 느끼는 점 많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으로 내보낼 수 없어 안타깝다. 진홍이의 ‘개자식’을 읽으면서 통쾌함을 맛보았다. 진홍이야 말로 <피서(避暑)>도, <피서(避書)>도 하지 않는 진정한 글쟁이인 것 같다. 비록 방송용은 아니지만, 이런 글이야 말로 팔팔 뛰는 생동감 넘치는 글이 아닌가. 요즘 이 시를 읽으면서 위로도 받고, 대리만족도 느끼며 <삶>의 여유와 용기를 되찾고 있다.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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