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 리처드 도킨슨이 명명한 ‘유전자의 숙주’ 노릇을 충실하게 감당하기 위한 결합이다. 결혼하지 않고 당대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2세는 당연히 꿈꿀 수 없고 유전자를 물려줄 수도 없지만, 유한한 생명을 자가증식하는 길은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새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킴으로 말미암아 인간이라는 종의 유전자를 번식시키는 행위이다.
이렇듯 결혼에는 유전자 번식의 가능성을 품은 생명과 생명의 결합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헌데 그 결혼에 ‘피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예사 제목이 아니다. 생명 증식이라는 종의 명령에 거꾸로 가듯,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전야제가 되어야 할 결혼이 도리어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명제로 발 빠르게 달려가기만 한다.
한국인을 한(恨)의 민족이라 일컫듯 우리 음악은 한의 정서가 서린 음악이 많다. 외국인이 보면 마냥 흥겨워 보이는 플라멩코 역시 가톨릭의 핍박 아래에서 애처롭고 처연하게 피어난 한 서린 집시의 춤이 아니던가. <피의 결혼>에서 캐릭터들이 대사를 읊조릴 때 현란한 플라멩코 스텝으로 운율은 맞추는 것과 우리의 굿거리장단이 합을 이루는 것, 정서적 교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의 정서가 한국과 스페인이라는 국경을 초월하여 응수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스페인 집시의 한을 응축한 극적 장치는 마냥 흥겨워 보이는 플라멩코가 다가 아니다. 결혼과는 어울리지 않는 칼이 극 초반에 등장한다. 칼은 타나토스의 장치이지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결혼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칼은 파괴를 위한, 끊음을 위한, 단절을 위한 도구이지 새 생명을 태동하기 위한 도구가 결코 아니다.
<피의 결혼>은 결혼이 인신공희의 장으로 뒤바뀌는 역설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루나틱, 달의 광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극 후반 두 남자가 칼로 뒤엉키기 전과 후의 무대 뒤 달의 색깔을 눈여겨보라. 달 역시 인간의 피를 바라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칼날의 광기가 대지를 피로 적실 때 붉게 물드는 건 단지 대지뿐만이 아니다. 달 역시 피로 벌겋게 물들고야 만다. 인간의 질투가 달의 광기와 맞닿을 때 일어나는 비극을 무대 뒤 달이라는 배경을 통해서도 충분히 관찰 가능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