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명분 아래 리처드 도킨슨이 명명한 ‘유전자의 숙주’ 노릇을 충실하게 감당하기 위한 결합이다. 결혼하지 않고 당대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2세는 당연히 꿈꿀 수 없고 유전자를 물려줄 수도 없지만, 유한한 생명을 자가증식하는 길은 바로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새 생명을 잉태하고 탄생시킴으로 말미암아 인간이라는 종의 유전자를 번식시키는 행위이다.

이렇듯 결혼에는 유전자 번식의 가능성을 품은 생명과 생명의 결합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헌데 그 결혼에 ‘피의’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예사 제목이 아니다. 생명 증식이라는 종의 명령에 거꾸로 가듯,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전야제가 되어야 할 결혼이 도리어 타나토스라는 죽음의 명제로 발 빠르게 달려가기만 한다.

▲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피의 결혼>에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우리네 6.25 전쟁과 같은 피의 상흔이 잠재되어 있다. 전쟁이 남기는 상흔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타인을 적대시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다. 극 중 안달루시아의 억척어멈은 며느리를 받아들이기 전에 어느 혈통인가를 따지고 또 따진다. 행여 나쁜 피가 가문에 섞일까봐, 아들에게 나쁜 피의 며느리가 결합할까 노심초사하고, 시어머니의 이런 노파심은 현실이 되어 비극으로 치닫고야 만다.

한국인을 한(恨)의 민족이라 일컫듯 우리 음악은 한의 정서가 서린 음악이 많다. 외국인이 보면 마냥 흥겨워 보이는 플라멩코 역시 가톨릭의 핍박 아래에서 애처롭고 처연하게 피어난 한 서린 집시의 춤이 아니던가. <피의 결혼>에서 캐릭터들이 대사를 읊조릴 때 현란한 플라멩코 스텝으로 운율은 맞추는 것과 우리의 굿거리장단이 합을 이루는 것, 정서적 교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의 정서가 한국과 스페인이라는 국경을 초월하여 응수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스페인 집시의 한을 응축한 극적 장치는 마냥 흥겨워 보이는 플라멩코가 다가 아니다. 결혼과는 어울리지 않는 칼이 극 초반에 등장한다. 칼은 타나토스의 장치이지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결혼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칼은 파괴를 위한, 끊음을 위한, 단절을 위한 도구이지 새 생명을 태동하기 위한 도구가 결코 아니다.

▲ 사진 제공 명동예술극장
작은 칼이 극 초반에 선보인다는 건 그만큼 극 중 결혼이 축복받는 결혼, 행복한 결혼이 아니라 비극을 태동한, 누군가의 피를 담보로 삼아야 하는 제물 의례로서의 결혼이라는 점을 상기하게끔 만들어준다. 새 생명을 만들어내기 위한, 축복받아 마땅한 결혼이 되레 피를 담보로 삼는 인신공희의 장으로 뒤바뀌는 역설이 극 초반의 칼로 상징화하는 순간이다. 생명 탄생의 기쁨과 두 남녀의 결합이라는 희열은 첫날밤을 맞이하기도 전에 산 사람의 피를 바라는 타나토스의 비극, 인신공희의 장으로 뒤바뀐다.

<피의 결혼>은 결혼이 인신공희의 장으로 뒤바뀌는 역설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루나틱, 달의 광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극 후반 두 남자가 칼로 뒤엉키기 전과 후의 무대 뒤 달의 색깔을 눈여겨보라. 달 역시 인간의 피를 바라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칼날의 광기가 대지를 피로 적실 때 붉게 물드는 건 단지 대지뿐만이 아니다. 달 역시 피로 벌겋게 물들고야 만다. 인간의 질투가 달의 광기와 맞닿을 때 일어나는 비극을 무대 뒤 달이라는 배경을 통해서도 충분히 관찰 가능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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