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주말판의 고경태 에디터와 식샤할 기회가 있었다. 고경태 에디터는 내게 “<월간잉여>의 에디터로서 가장 신뢰하고 글을 기다리게 되는 필자”에 대해 물었다. 나는 ‘가장(best)’을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대충 얼버무린 뒤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저도 ‘가장’에 대한 대답은 어렵긴 한데, 개인적으로 정희진님의 글을 기다리게 됩니다”라고 답했다. 정희진님이 누구신지 생각하며 잠깐 멍 때리고 있자, 그는 약간 의아한 기색을 띄며 “<페미니즘의 도전> 쓴 정희진님이요.”라고 재차 확인해주었다.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그 말이 ‘교양인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책을 읽지도, 심지어 들어보지도 않았냐’는 비판처럼 느껴져 괜히 혼자 찔렸다. 그래서 읽었다, <페미니즘의 도전>!
사회 정의와 성찰적 지성을 위한 방법론, 페미니즘
저자는 페미니즘을 ‘다른 목소리’라고 말한다.
‘다른 목소리’는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고 풍요롭게 해주며 자기중심주의를 돌아보게 한다. 또한 모든 사람은 ‘다른 목소리’의 잠재적 주인공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성주의다. 여성주의는 양성 평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 성찰적 지성을 위한 방법론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여성주의를 공부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특히, 논쟁이나 글쓰기, 말하기에 관심 있는 이라면 페미니즘을 공부하길 권한다. 논쟁은 승부가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의 입장(지식)과 그러한 입장이 형성된 과정을 교환하는 것이다. (p.11)
페미니즘이 “사회 정의와 성찰적 지성을 위한 방법론”인 이유는 젠더가 “개별 학문이 아니라 일종의 관점이자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 공동체주의 등등은 모두 현재 지구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여성주의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세계관, 인식론, 인식 방법론으로서 여성주의다. 대안적 인식론으로서 여성주의는 기존 사회의 궤도 밖에 존재하면서도, 사회의 궤도 수정을 돕는다. 인식 방식을 선택된 언어 외부에서 찾는다. 선택 밖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p14-p.15)

인식 방식을 선택된 언어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은 현재 언어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됐다는 문제의식을 기반에 둔다.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완전한 ‘객관’이란 없다. 저자는 묻는다. 왜 박완서는 ‘제3세계’ 문학이고 괴테는 ‘세계문학’인가? 왜 한국의 프로야구 최종 결선은 ‘코리아 시리즈’인데 미국은 아메리칸 시리즈가 아니라 ‘월드 시리즈’인가?

맞벌이 가정의 남성들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할 때 ‘돕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과거의 가부장적 인식체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둘 중 한 명만 나가서 돈을 벌어온다면 집에 있는 시간이 긴 사람이 가사노동을 전담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둘 다 밖에 나가 돈을 버는데, 왜 여성이 가사노동까지도 전담하고, 남성은 그걸 ‘돕는다’고 생각하나? 뭔가 잘못된 인식 방법 같다. 맞벌이 부인의 평균 가사노동 시간이 남편보다 7배가량 많다는 자료(김주희 '맞벌이 부부의 시간배분을 통해 본 일-생활 유형 연구')를 보면, 가슴이 먹먹하고 손발이 저려온다. ‘00녀’라는 용어 사용도 왜곡된 인식 방식이 반영된 언어로 꼽을 수 있다. 00남이라는 언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에 비해 00녀라는 언어의 사용은 빈번하고 광범위하다. ‘개념녀’, ‘된장녀’, ‘김치녀’… 이 모든 언어에는 유독 여성들의 행동을 문제 삼으며, 여성을 통제하고 길들이려는 가부장적 인식이 반영돼있다.
군사주의와 남성성에 대한 성찰
군사주의 역시 한국 사회에 뿌리박힌 통념이다. 얼마 전 모 언론사 사설에 여성 징병도 진지하게 생각하자는 주장이 등장했다. 엊그제는 모 판사가 자살한 성폭력 피해 여성장교의 가해자 육군 노모 소령에게 ‘초범 드립’을 치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이런 사건은 우리에게 군대와 군사주의에 대해 다시금 성찰하게 한다.
글쓴이는 군대가 존재하는 한 여성에 대한 차별, 폭력, 범죄 등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군 가산제 논란은 이른바 ‘이회창 가(家)’와 같이 군대를 가지 않는 남성 혹은 남성을 군대에 동원할 수 있는 남성 지배 세력과 군대에 가야 하는 남성 간의 갈등이, 군대를 가는 남성과 ‘군대도 못 가는’ 여성들 간의 갈등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성차별적 현상이다. 군대를 가는 남성은 안 가는 남성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못 가는 여성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느낀다. 군대를 안 가도 되는 남성에 대해서는 분노와 적대감을 가져도 그것을 공식적인 저항으로 표출하지는 않으며, 여성, 장애인, ‘방위’등에 대해서는 남성성에 대한 미달, 남성다움이 훼손된 존재로 인식하고 비하와 조롱을 일삼는다.(p.248)
군대에 가지 않는 한국여성들을 멸시하는 이들은 이스라엘의 예를 들며 한국여성을 공격한다. (온라인에서 이런 글을 쓸 때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의상을 입고 화장한 얼굴로 화사하게 웃는 이스라엘 여성 군인 사진을 첨부하면 동조의 댓글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적과 피보호자를 상정하는 군대가 존재하는 이상, 여성이 군 복무에 남성과 평등하게 참여한다고 해서 시민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여성 복무는) 공정함을 추구하는 정의가 아니라, 남성과의 같음을 강요하는 남성 동일화”라고 말하며 이스라엘의 여성 징병을 한국의 여성 징병 당위성을 지탱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을 지적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 징집을 실시하는 이스라엘은 여성이 남성보다 4개월에서 1년까지 복무 기간이 짧다. 여성 군인 중에서 계속 군에 근무하는 비율은 10퍼센트 미만으로 거의 하급 직종에 집중되어 있으며, 여군들은 여성적 태도와 화장술을 지도받는다. ‘전인민의 군사화’를 시행하고 있는 북한 역시, 여성의 군대 참여는 철저히 성별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북한 여성은 결혼 전까지만 군사 훈련에 참가하며, 결혼하면 그 의무가 중단된다. (p.250)
게다가 “군대에서 일하는 여성, 군인들이 상상하는 여성 이미지는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성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어머니’ 아니면 ‘창녀’의 재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위협도 존재한다.
군대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업무 내용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매춘 여성’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군대가 남성의 공간이기 때문에 거친 남성들 사이에 사는 여성들(특히, 낮은 직급일 경우)은 ‘돌려도 되며’, 군대에 들어온 여성은 이미 그것을 각오한 여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략)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규범적인 여성성을 대표하는 중산층 여성은 군대에서 허드렛일을 할 이유가 없다. 때문에 남자들 틈에서 살기로 작정한, ‘고귀함을 잃어버린’ 가난한 여성들은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으며, 이들에 대한 성적 비하는 남성 군인들의 성 정체성 확립과 남성 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p.260)
여성 없이 존재하는 군대는 없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일제는 연합군의 폭격을 피해 깊은 동굴 등에 숨어 지내면서도, ‘종군 위안부’들을 그런 대피소에까지 끌고 다녔는데, 이는 종군 위안부가 전쟁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존재, 전쟁의 부산물이 아니라 전쟁을 구성하는 핵심제도라는 것을 보여준다. (중략) 성매매, 성폭력과 같은 군대의 여성에 대한 조직적 성적 수탈은 전의 고양 수단, 참전이라는 희생에 대한 보상 행위, 불만, 분노와 공포의 ‘하수구’로 기능하여 폭력을 합법화하는 군사주의를 뒷받침한다. (p.266-p.267)
이런 군대에 대한 성찰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많은 남성들은 학습된 군사문화를 사회 전역에 전파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군 제도에 동원되는 피지배 계급 남성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성찰하여 지배계급 남성과의 연대와 동일시 욕망을 극복하고 여성들과 연대”할 것을 희망한다. 전쟁으로 돈을 벌고 권력을 얻는 이들, 군대에 가지 않거나 ‘꿀보직’을 받는 지배계급의 아들들과 달리, 군대에 끌려가야만 하는 피지배계급의 남성들은 전쟁의 이익과 무관하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그래서 ‘2등 국민’인 여성이나 장애인을 공격하며 피해를 보상받으려한다. 그러나 군대와 징병제에 대한 구조적인 성찰을 하지 않고 2등 국민을 공격하는 행위는 결국 지배 계급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것이며 부당한 구조를 지탱해나가게 하는 동력이 될 뿐이다.
폭 넓게 연대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기 자본주의가 재편한 삶의 터전에서 고통 받고 있다. 나는 폐허 위에 살고 있는, 스스로 ‘잉여’라는 감각을 느끼는 사람들이 폭넓게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잘못된 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폭넓은 대상과 소통하고 우애의 관계를 맺는 것이 근원적인 외로움을 (소거시킬 수는 없겠으나) 감소시키고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남성(잉여)들은 여성을 연대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격렬하게 혐오하고 적대시한다. 이 책을 읽고 여성을 적대시하는 이들의 ‘멘탈’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글쓴이가 책에서 인용한 브라질 민중 교육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말을 빌리자면, “남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지역, 학벌, 외모, 장애, 나이 등 차별과 억압의 기제는 다양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번쯤은 소수자가 되고, 차별을 받아봤을 것이다. 그 때 느꼈던 ‘소수자 감성’을 소중히 여기고 일상 속에서 성찰과 고민을 거듭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특히 잉여라면 소수자 감성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지배 계급과의 동일시 욕망”을 벗어 던지고 다른 잉여들과 대안적 삶을 사는 걸 모색하고 실천했으면 바란다. 지금의 구조를 만든 이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고, 구조를 바꿔 달라 요구하지 않은 채, 같은 소수자 중에 분풀이 대상을 잡아다 ‘조낸 패는’ 건 일시적인 쾌감을 줄 수도 있겠으나, 그래봤자 비루한 현실은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남는 건 공허함과 외로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도전>에 도전하길 권한다. 다른 시각과 질문을 통해 사고를 통풍할 수 있을 것이다. 교양인이 된 기분도 느낄 수 있다. (마침 책을 펴낸 출판사 이름도 ‘교양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기는커녕 이 글도 길다고 안 읽겠지? 아마 안 될 거야….

잉집장

<월간 잉여>는 잉여를 위한 잉여에 의한 잡지입니다. 15호까지 발간됐습니다. 이름만 월간 잉여임. 갈수록 발행텀이 길어지고 있음. 발행인 겸 편집인이 게으른 탓입니다. 그 발행인 겸 편집인이 저임. 최근 이상한 웹진 커뮤니티 사이트도 만들었는데 놀러오세요. http://ingch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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