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생활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시도하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가 시골에 삶의 터전을 꾸리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아파트 공터에 소품장식과 그림 등을 전시하고 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소위 ‘이발소 그림’으로 기억하면 얼른 떠오르는 유형의 그림이 많이 있었다. 나이 먹어 다시 보니 마을 앞 호수하며 물레방아, 마당에서 한가로이 모이를 쪼아 먹는 닭 무리, 초가집 위로 둥근 떠오른 한가로운 보름달 등 여러 가지 그림들이 마음의 안정을 주는 것이었다.

어릴 때는 너무 흔한 그림이어서 촌스럽기 그지없더니 나이 먹고는 그런 풍광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 아닌게 아니라 누구나 고향으로 회귀하고 싶은 본능이 있는 모양이다. 그림을 보면서 “저런데서 살면 참 좋겠다아~”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당시 5살이던 큰 아들이 “근데 엄마, 저런데서 살면 회사는 어떻게 가?” 라고 말해서 번뜩 정신이 들었다.

▲ 음수동 가양주 만들기체험 취재하는 모습.
20여년 전의 일이 지금도 생생한 것은 시골 살이가 단순히 감성만 가지고 접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회사를 어떻게 가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서 시도하지 못한 일이 지금은 ‘아이들 교육’을 이유로 미적미적 눌러앉아있다. 더욱 엄밀히 말하면 공교육이 아니라 ‘사교육’이 문제지만…….

차선책으로 아파트를 떠나 한옥 같은 개인주택으로 이주할 것을 고려해보기도 했으나 방범과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농촌은 지금도 외갓집 같고 그곳 어르신들이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같아서 항상 그리움의 대상이고, 언젠가는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서 애정을 갖고 있다.

농촌 지역으로 취재를 다니다보면 농촌의 단면을 보게 된다. 3~4년 전 동요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섬진강 시인 김용택선생님과 코너를 함께 한 적이 있는데 한달에 두어번 녹음을 하러 전북 임실군 덕치면에 다니러 갈 때 마다 드러나는 농촌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인구 노령화는 말할 것도 없고 농촌을 떠난 학교는 아이들의 웃음이 현저히 줄었다.

부모 이혼으로 인한 결손가정, 혹은 부모의 부재로 인한 조손가정이 비일비재하고 무엇보다 피폐한 경제문제가 생각보다 더욱 심각하다.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결국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는 것이다. 물론 고향을 뜬다고 해서 서울에서 만만한 삶의 질을 누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촌이 살만하고 촌에서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면 누가 도시 빈민자를 각오하면서까지 서울로 가겠는가.

사회적으로 농촌을 살려야 하는 과제도 있다. 지금처럼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커지고 이로 인한 지역 간 갈등이 심화되는 것이 우려되는 실정에서 끊임없이 지역문제,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고민하면서 실천적 대안을 찾아보는 것은 절실하고 시급하다. 도농문제, 지역차별 문제는 내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 자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 내가 지역에서 살면서 얻은 이익도 있지만 지역에서 살기 때문에 받는 불이익도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남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명박정부 들어서 가뜩이나 고소영이니 강부자내각 이니하면서 우려를 자아내더니 약속한대로 민의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작금의 국정수행 절차나 방법이 심히 우려스럽다. 급기야 이젠 대한민국이 ‘서울 공화국’도 아닌 ‘강남 공화국’이라는 얘기까지 떠돌고 있다. 대한민국 ‘1%를 위한 정책’이 분야별로 곳곳에서 입증되고 있고 1%에 속하지 못한 99%는 어쩌면 농촌 문제에 이어 심각한 국민적 분열로 치닫을지도 모른다. <농촌과 도시>문제, 또는 <서울과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받은 1% 와 국정 관심밖에 있는 99%>의 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다.

이제는 지역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할 때다. 지역에 힘을 불어넣어야 고루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갈 수 있다. 지역역량 강화와 국민화합은 이런 때야 말로 절명한 과제다. 지난 해 기획해서 방송문화진흥회 프로그램제작지원사업에 선정된 <대한민국 촌놈>이라는 특집을 추석을 앞두고 9월10일 방송을 목표로 막판 취재에 힘을 쏟고 있다. 라디오에서 마당극은 어떤 실험적 가치가 있을까 싶어서 마당극 형태를 도입해보기로 했다. 구성은 자유롭지만 주제는 확연하다. 촌놈 무시하지 말고 지역성 인정하여 서로 서로 살기좋은 대한민국 만들어가자는 거다. 왜 이런 동요도 있지 않은가? “아랫집 윗집 사이에 울타리는 있지만 기쁜 일 슬픈 모두 내일처럼 여기고 서로 서로 도와가며 한집처럼 지내자 우리는 한겨레다 단군의 자손이다” (서로 서로 도와가며 / 어효선 작사 / 정세문 작곡)

▲ 진안 마을축제 정경. ⓒ진안 마을만들기 홈페이지
최근에 전북 진안에서는 제1회 진안군 마을축제가 열렸다. ‘마을이 살아야 지역이 살아난다’는 전제 아래 마을 만들기와 도농교류, 귀농귀촌 등 3개의 테마를 연결하여 시도하는 전국 최초의 축제다. 10여년 전부터 마을 만들기를 추진해온 진안군은 지난해 전국 최초로 열린 마을 만들기 전국대회의 성과를 확장해서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진안군내 20여개 체험마을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8월7일부터 16일까지 2주동안 무려 30여 가지의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틈틈이 진안에서 취재를 하는 동안 촌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어서 보람되었다. 무엇보다 희망을 잃지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든든했다.

어쩐지 물이 맑을 것 같은 진안군 성수면 음수동 마을에서는 <전통 가양주의 농촌마을상품가치>를 주제로 체험과 토론이 있었는데 경북 안동에서 30여명의 주민들이 찾아와 큰 관심을 보였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아뿔사! 전주 가까이 와서 녹음기를 제외한 장비 가방을 마을회관에 놓고 온 것을 깨달았다. 마을 간사님께 휴대 전화를 하니 연결이 안된다. 휴대전화 조차 터지지 않는 깡촌이었던 것이다.

다시 자동차를 돌려 음수동마을을 찾아가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은 것도 신기한 일이다. 시간에 쫒겨 급히 이정표만 보고 마을을 찾았는데 다시 되돌아가는 길에 찬찬히 마을을 살펴보니 초입에서부터 각종 꽃을 심어 마을이 매우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구석구석 통나무를 활용한 놀이터라던가 저수지 아래 하늘거리는 구절초가 한폭의 그림같다. 마을 주민들의 정성이 느껴진다. 마을 아낙이 금방 부쳐낸 고추전, 고구마 순을 데쳐 갓 버무린 고구마순 김치를 내어오며 밥 한술 뜨라고 권한다. 이 인심, 이 정성, 이 감동, 이 사람 사는 맛! 촌에서 살아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름도 아름다운 진안군 동향 능금리 능길마을은 이미 농촌체험마을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는 빠른 시일내 성공한 비결에 대해 능길권역 박천창위원장은 “10년 계획하고 준비하여 10년 후에 평가받자며 10여년 전부터 준비한 일”이라고 말한다. 체험마을을 뛰어넘어 도농상생 생활공동체, 지역공동체, 경제 공동체를 지향하는 능길마을에는 이달 말 40여가구가 전원마을인 새울터에 입주, 마을 학교에 학생이 늘어나는 등 마을에 생기가 돌고 있다. 귀농가족은 오래전부터 꼼꼼히 설계하고 준비해왔다고 소개한다. 농촌에서 희망이 있기에 기꺼이 촌놈을 자처한 것이 아닐까? 이들은 무엇보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입을 모은다. 역시 촌에서는 사람귀한 줄 알고 사람귀히 여길 줄 안다.

취재현장에서 만난 한 원로 예술가는 “마을은 세포와 같은 것”이라며 “다른 장기도 중요하지만 세포 하나 하나가 건강해야 몸이 건강한 것 아니겠느냐”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새삼 세포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마을이 국가의 세포라면 지역방송은 방송의 모세 혈관과도 같은 기능이 아닐까? <대한민국 촌놈> 방송은 모세혈관에서 시작되겠지만 세포가 모여 장기를 이루고 모세혈관이 원활한 혈액을 공급하는데 기여하듯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 모쪼록 촌에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길 기원한다. 촌아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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