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자에게는 낯설지 모르지만 지난 27일에 개봉한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수입 ‧ 배급 영화사진진)의 원작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단편 소설 <미하엘 콜하스>는 처음 소설이 발표되었던 19세기 초 이후 많은 이들의 손에 의해 재창작되고 다시 읽힐 정도로 매력을 지녔던 작품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에서 임꺽정이나 장길산의 이야기가 계속 읽히는 것과 같은 맥락을 지닌다. <미하엘 콜하스> 역시 실제 독일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정의를 위해 들고 일어났으나 결국엔 끝맺음을 내지 못한 반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각 작품마다 조금씩 내용은 다르나 이야기의 공통적인 얼개는 이러하다. 16세기 독일 작센 지방에 말 중개상 미하엘 콜하스라는 이가 가족과 하인 몇몇을 거닐고 살았는데 어느 날 말을 팔기 위해 성으로 가다가 길을 지키는 문지기로부터 전에는 없었던 통행료를 요구받게 된다. 기존의 영주가 사망한 이후 새로운 영주가 들어서면서 통행료가 생기게 된 것이었다. 결국 통행료 조로 잠시 검은 말 두 마리를 검문소에 맡기되 온전하게 보관하는 조건으로 관문을 통과해 성으로 들어가지만, 정작 거래를 마치고 난 이후에야 그 통행료 규정이 영주가 제멋대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검문소에 맡긴 말 두 마리는 생기가 죽은 채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말을 지키고 있던 하인 역시 마구 폭행을 당해 있었다.

이렇게 불합리한 처사에 분노한 콜하스는 영주를 처벌하기 위해 고소를 하지만 영주는 높으신 분들과 인맥이 많은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고소는 청구하는 즉시 족족 기각당하고 만다. 이를 보다 못한 아내가 직접 고소를 하려고 찾아 가지만 도리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결국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던 콜하스는 하인들과 함께 영주를 직접 처단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점점 많은 농민들이 붙으면서 반란의 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이 과정에서 반란군은 영주를 찾는다는 목적으로 다른 마을에 불을 놓거나 약탈을 하게 되고 이를 보다 못한 (역시 실제 인물인) 마르틴 루터는 콜하스를 찾아가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루터의 설득 등으로 반란은 끝이 나고 콜하스의 소원대로 영주는 처벌받게 되지만 그 대신 콜하스는 치안을 어지럽혔다는 명목 등으로 사형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한눈에 봐도 미하엘 콜하스의 이야기는 한국의 임꺽정-장길산이나 조선 후반기에 있던 각종 민란을 연상하게 만든다. 소설의 원작자 클라이스트가 의도했던 것처럼 미하엘 콜하스는 기득권의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여 농민들과 함께 맞선 의로움의 상징이고, 그를 맹목적인 파괴자라 비난하는 마르틴 루터는 그가 전통적인 천주교에 맞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종교적인 질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의로움을 단박에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은 발칙하게도 기본적인 틀은 유지하되 반란을 일으킨 자, 반란을 막으려했던 자 모두에게 비판의 메스를 세우고 접근한다.

영화에서 미하엘 콜하스는 마르틴 루터의 입을 통해 사적인 복수를 자신과 관련 없는 농민을 끌어들여 이용한 자로 비춰진다. 이는 단순히 등장인물의 대사로 그치지 않는다. 작품의 초반부터 중반부까지는 원작 소설이 그랬던 것처럼 미하엘 콜하스가 어떻게 불의에 대해 저항하는 지를 차분히 그려나가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그가 일으킨 반란의 이면을 서서히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비록 약탈은 엄한 죄이나 죄를 저지른 자에게 소명이나 속죄의 기회 없이 바로 죽음으로 처벌을 내리며, 심지어는 자신이 원래 세웠던 목표가 달성될 기미가 보이자 가차 없이 반란군을 해산하고 만다. 그의 반란군을 찾아간 농민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봉건적 질서에 저항하기 위해 함께했지만 정작 그는 농민들과는 애초에 다른 길을 걷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르틴 루터가 마냥 선한 이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콜하스가 일으킨 반란이 어떠한 한계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으나, 반란군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농민과 귀족 간의 화합이 중요하다는 것만을 계속 설파할 따름이다. 이것은 실제 마르틴 루터가 원작의 모티브가 된 독일의 농민 반란 사건에 대한 태도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로마 교황청이 면벌부를 팔아 신자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것에 분노하고서 다른 길을 걸어갔으나, 정작 그는 그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을 읽고서 구원의 희망을 가지고 반란에 나선 농민들의 봉기에는 반대하고 심지어 반란군이 교회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들려오자 무자비하게 진압할 것을 주장했다. 실제 마르틴 루터가 많은 한계를 지닌 이었던 것처럼, 영화 속의 마르틴 루터 역시 종교적 이상으로 인한 한계를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이는 원작에서는 비중이 없지만, 영화에서 큰 비중을 가지고 나오는 콜하스가 살던 지역을 다스리는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인자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들이 일으키는 반란에는 그저 엄격한 자세를 보일 따름이다.

결국 이 과정에서 소외받는 것은 콜하스의 반란군을 따라갔지만 막판에는 사실상 버려지고, 딱히 아무 것도 얻은 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벌받을 위기까지 놓였던 농민들이다. 그들에 좋은 인상으로 다가서려는 이들은 많지만 정작 그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이는 없고 그저 이용을 당하거나 엄격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서만 이야기된다. 영화는 이렇게 단순한 원작 소설의 재현을 넘어 과연 이들의 반란이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깊게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단순히 이러한 고민을 영화 안에서 그치는 대신 실제 역사에 존재했던 각종 민란과 반란, 그리고 현재에도 벌어지는 각종 반정부 시위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어떤 관객들은 주인공 미하엘 콜하스 역을 맡은 배우가 <007 카지노 로얄> 등 액션 영화에 나왔던 매즈 미켈슨이라는 사실에 액션을 기대하고 영화를 보았다가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등급은 ‘청소년 관람불가’이지만 이는 초반 콜하스와 그의 아내가 벌이는 정사의 수위가 높아서 그런 것일 뿐 영화의 액션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한국에서 개봉한 <더 헌트>에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매즈 미켈슨의 연기에는 카리스마와 감정이 가득 넘쳐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여기에 후반부 그와 갈등을 하는 마르틴 루터 역을 <소년 소녀를 만나다> <퐁네프의 연인들> <홀리 모터스> 등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페르소나로 잘 알려진 드니 라방이 맡으면서 연기의 맛이 더욱 살아난다. 비록 본격적인 전쟁 영화는 아닐지라도 정의가 무엇이고 봉기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할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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