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이명박근혜’라고 불리는 일련의 세월 동안, 당신이 그 ‘조어’에 찬성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 정치적 흐름이 특정한 문화적 현상을 촉발시켰단 점이다. 반대자를 배제하며 질주하던 이명박 정부는 무수한 ‘조롱’의 대상이 되며 이른바 ‘나꼼수 현상’을 폭발시켰다. 하지만 그 열기는 끝내 정치적 승리로 귀결되지 못했고, 정체된 정치적 상황을 헤집는 문화적 기획들만 번번이 성취를 거뒀다. 박근혜 정부 1년 동안 ‘소통’이 여전한 사회적 취약으로 거론되면서, 또 이에 대한 무수한 은유들이 난무하고 있다.

<나꼼수>와 <광해>, 일련의 정치적 다큐멘터리들과 최근의 <변호인> 그리고 <또 하나의 약속>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묶을 순 없지만 어찌되었건 정치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를 입증하는 일련의 창작들이 한국 사회에 던진 혹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무엇인지를 탐구해보고자 한다. 한판 승부와 같은 극적 ‘신당 창당’ 선언으로 또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한 정치의 계절에, 예사롭지 않았던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문화적 흐름을 묻는다. 정치와 문화의 콜라보레이션은 정말 세상을 바꿀 것인가?

① '나꼼수'에서 '또 하나의 약속까지' : 문화와 정치의 콜라보레이션
② 정치적 기획이 동반된 영화들이 낳은 정치적 현상과 정치적 효과
③ 저널리즘의 위기와 무비 저널리즘의 시대

우리의 삶은 정치를 통해 구성된다. 정치는 삶의 다양한 조건을 결정하는 과정을 갖는다. 우리가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근대 이후의 삶에서 정치는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정치가 대중의 일상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가 일상의 영역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동하지만, 정작 일상에서 정치는 전혀 다른 별개의 영역으로 취급당하기 일쑤다. 이는 대중을 이해하고 일상의 사소한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어려운 지점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일상의 문화는 대중이 가장 친근하게 만나게 되는 지점이면서도 동시에 정치로는 설명할 수 없고 설명되지도 않는 부분이다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사례는 지난 MB 정부에서 경험했던 소위 ‘민주 시민’들의 당혹스러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최소한의 양심이나 가치를 가차 없이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상식은 인간의 사고를 통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최소한의 대중적 합의를 토대로 하는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MB 정부에서는 그러한 과정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상식을 지키려던 사람들은 분노와 체념의 모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체념은 한편으로 다음 기회를 노리는 방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 역시 실패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의 민주 정부라고 했던 ‘국민의 정부’나 ‘참여 정부’가 훨씬 더 좋았는가라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보수 정권에 비해서는 상식이 통용되는 사례가 더 많았고 민주적 절차와 토론을 위해 애쓴 부분이 있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대중과 정치의 관계, 즉 대중이 정치를 바라보고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방식의 측면에서 보자면 동일한 방식이 작동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결국 정권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그 부분은 우리가 일상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전망을 고민할 때 계속 부닥치게 되는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박근혜 정부 1년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인식은 새로운 혼란을 만날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과는 또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탄생을 원하지 않았던 이들이 여전히 이명박 정부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60%가 넘는 지지율의 여론조사는 믿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믿기 힘들 정도이다. 현실적으로 대안이 없는 곤혹스러움은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운동 진영이나 ‘민주 시민’의 대중정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연이은 보수정권에 대한 대응이 이처럼 난관에 부닥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어쩌면 문제는 우리에게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정치와 일상, 문화의 영역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 '국내 최초 가카의, 가카에 의한, 가카를 위한 가카헌정공연 <나는 꼼수다>(나꼼수)'의 서울콘서트 당시 모습. 시사평론가 김용민씨가 조현오 경찰청장,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의 성대모사를 하자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정봉주 17대 국회의원, 주진우 시사인 기자 등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오마이뉴스)

MB 정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멘붕’에 빠져 있었는데, 2011년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 열풍은 그러한 시대적 맥락과 맞닿아 있다. 나꼼수는 MB 정부의 언론탄압과 그로 인한 대중의 알권리를 진지한 방식이 아니라 대중의 감성에 걸맞은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성공을 거둔 것이다. ‘나꼼수’는 ‘가카 헌정방송’이라는 소개에서도 나타나듯이 철저하게 ‘이명박’이라는 단 한 사람으로 수렴되고, 동시에 한 사람을 공격하는 방식을 취했다. 당시 그는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었음에도 ‘경제 활성화’ 담론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등장은 단순히 보수 정권의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럼에도 MB 정부의 실체는 거짓과 기만과 통제와 검열과 불통이었다. 절차와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현실에서 '나꼼수'는 일종의 전략적 선택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꼼수’가 대단히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처럼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꼼수’는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매체형식, 새롭고 발랄한 캐릭터, 기성언론과는 다른 일상어의 구사 등을 중요하게 내세웠다. 내용만 놓고 본다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상태를 원하는 것이었다. 상식이 사라진 상태를 만든 개인과 집단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교양이나 상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합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내용과 표현의 관계에서 상호 일치하지 않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나꼼수’에 대해 실망하는 이들은 바로 이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거나 혹은 내용의 평범성 때문이었다.

‘나꼼수’는 한편으로 정치의 예능화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썰전’(jtbc)과 같은 프로그램이 등장하는가 하면, 종편의 시사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예능적 요소를 가미하기 시작했다.(물론 출연자들의 수준이 떨어져서 의도하지 않게 예능프로그램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나꼼수’처럼 정치의 예능화가 대중성의 측면에서 큰 효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목표는 결국 ‘민주 시민’과 같은 정도에 머무는 것이다. ‘썰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사회자가 있고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각각의 주장을 주고받는 형태라는 점에서 결국 합리적 판단을 도출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정치의 예능화는 결국 인문학의 대중화만큼이나 그 한계가 명확하다.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최대치는 ‘민주 시민’이다.

▲ 민주당 문재인 의원이 영화 '변호인'을 감상하기 위해 3일 오후 부산 부산진구 롯데시네마를 방문, 영화가 시작되기전 영화속 실제사건인 '부림사건'의 피해자였던 송기인 신부와 악수를 하고있다. (연합뉴스)

그런 점에서 영화 <변호인> 의 흥행 성공은 ‘나꼼수’ 열풍의 연장선상에 있다. 1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영화를 보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 곧 세상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호인>을 관람하고 추천하는 지점이 바로 ‘민주 시민’의 경계라 할 수 있다. 상식과 양심, 정의가 살아있는 사회에 대한 갈망을 담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어떨까? ‘나꼼수’나 <변호인>이 정치권력의 문제라면, <또 하나의 약속>은 자본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 시대 약자들이 처한 또 하나의 현실, 즉 정치적 권력과는 다른 형태의 자본 권력의 희생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다. 단일하거나 투명한 텍스트는 없다. 모든 복수적이고 맥락적이다. 그런 점에서 <또 하나의 약속>은 영화 내용과 별개로 제작과 배급, 개봉 과정에서 나타난 다양한 사회적 권력관계, 특히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문제점과 삼성이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침투해 있는가를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영화 개봉 초기에는 그토록 스크린 확보를 위해 애를 썼고, 개봉 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도록 추천과 독려를 거듭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45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냉정하게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이 영화의 의미와 중요성, 완성도 등의 문제는 차치하고, 정말 이 영화를 더 많은 사람들이 본다면 우리 사회는 달라질 것인가? 오늘날 자본이라는 '거대한 신'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과연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인가 물어야 한다. 이미 삼성이라는 기업의 문제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삼성은 풀리지 않는 문제이고, 법적으로는 대부분 삼성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문제제기를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회적’인 것의 맥락과 공간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정치적 이해관계나 지배집단의 권력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국민 정서’, 즉 대중의 정서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광고 때문이건 아니면 민족주의나 애국심의 문제이건 간에 삼성은 세계적 기업이라는 일종의 믿음은 만만치 않는 상대이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그러한 ‘사회적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적은 상영관과 멀티플렉스 체인들의 기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사회적 파급과 메시지를 만들어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를 봐야 한다’는 당위를 넘어선 질문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현실적 논란으로 인해 그러한 논의는 생략된 것은 아닐까? 이 영화를 왜 봐야 하는지,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좀 더 치열하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묻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정치적 곤란’을 생각하는 계기가 될 지 모른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시민이나 교양인의 탄생은 합리적이고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기대감이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은 그렇게 탄생한 '근대인’은 언제든지 퇴행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근대인이 장점으로 내세우는 이성과 합리성은 어느 지점에서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되며, 동시에 우리 사회에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 영역은 대중의 감각과 감수성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또 하나의 약속>은 특정 대기업의 문제점을 다룬 영화이다. 삼성이라는 거대 자본의 횡포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전제이다. 영화는 사실 혹은 진실을 담아냈다. 우리가 이 영화를 추천하는 것은 그 진실에 대한 응답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공적 매체로서 언론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고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중은 사실을 원하지 않는다. 사실을 소비할 뿐이다. 사실이나 진실은 더 이상 대중을 감동시키지 못한다. 대중의 감각은 노련할 정도로 발달되어 있다. 자신의 삶이나 일상을 건드리는 ‘불편한 진실’은 회피한다. <변호인>과 <또 하나의 약속>이 흥행면에서 큰 차이가 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레미제라블> 이나 <변호인> 을 보더라도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이다. 곧 개봉하는 또 하나의 삼성 영화 <탐욕의 제국> 역시 매우 중요한 영화이다. 하지만 더 이상 진실이 힘을 갖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정치와 문화는 친근하다 못해 근친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과거 문화를 정치의 도구로 삼거나 정치의 미학화를 시도하는 일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각각의 수준에 맞는 싸움은 필요하다. '나꼼수'나 <또 하나의 약속>, <탐욕의 제국>이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이다. 지금은 사실과 확신이 떠도는 시대이다. 사실은 확신을 낳고 확신은 독선과 배제를 잉태한다. 확신은 자신의 신념에 국한시켜야 하고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타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둘러싼 수많은 모순을 인정하고 제거하는 일이다. 모든 것이 정치적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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