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드라마가 어디까지 가려고 하나 하는 우려와 이웃집 싸움 구경하는 심정으로 관심을 끌던 <왕가네 식구들>이 마지막 회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어이상실'의 원칙을 견지하며 마무리되었다. <오로라 공주>나 <왕가네 식구들>과 같은 드라마의 후속작은 일반적으로 잘 나가던 드라마와 다른 부담을 가지고 시작하게 된다. '막장' 요소로 이름 높았던 전작의 조미료 같던 진한 맛을 지양하며 새 드라마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국민적 관심을 끌던 전작만큼은 관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이중적인 부담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영 2회 만에 30%를 넘은 <참 좋은 시절>의 출발은 두 번째 관점에서 순조로운 듯하다. '왕가네 식구들이 기록을 봐야하는 스피드 스케이팅이었다면, <참 좋은 시절>은 제한된 시간 안에 소소한 몸짓으로 점수를 얻어내는 피겨 스케이팅 종목이라고 규정을 내렸던 김진원 연출의 설명처럼, 소소하고 따뜻한 행복을 그려내겠다는 <참 좋은 시절>의 색채 또한 <왕가네 식구들>과는 2회 만에 그 차별성을 분명하게 각인시킨 것 같다.

<참 좋은 시절>은 그간 주중 미니시리즈만 집필해오던 이경희 작가가 2000년도의 <꼭지> 이후 모처럼 돌아온 주말극이다. 이미 <고맙습니다>를 통해 가족 간의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그려내며 전 국민적 드라마를 탄생시킨 바 있는 이경희 작가에게, 주말 드라마는 생소하거나 도전해야 할 장르라기보다는 조금 더 풍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또 다른 장이라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이경희 작가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가족으로부터 시작된 해원의 희생자들이곤 했으니까. 아직도 사랑에 대한 드라마라면 한번쯤 회자되곤 하는 <미안한다 사랑한다>에서 기본적인 갈등의 시작은 엄마 오들희(이혜영 분)의 숨겨진 아들이었던 차무혁(소지섭 분)이란 존재였다. <크리스마스엔 눈이 올까요>도 다르지 않다. 차강진(고수 분)과 한지완(한예슬 분)의 슬픈 사랑의 시작은 그의 부모 차춘희(조민수 분)와 한준수(천호진 분)의 비극적 관계로부터 잉태된다.

가족으로부터 잉태된 비극. 그렇게 이경희 월드의 시작은 도망칠 수 없는 운명적 관계로부터 시작되고, <참 좋은 시절> 역시 다르지 않다. 강동석(이서진 분)의 어머니 장소심(윤여정 분)이 차해원(김희선)의 집에서 가정부로 살게 되면서 갈등의 씨앗은 뿌려진다. 차해원을 좋아하지만, 가족들이 차해원의 어머니에게서 받는 수모를 견뎌내기 힘든 자존심 강한 강동석은 이경희 월드에서 그리 낯선 인물이 아니다. 그 자신 한 사람으로는 너끈히 자존감을 내세울 수 있는 존재이지만,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들어서면 한없이 상처받고 그래서 발톱을 세우게 되는 가녀린 짐승 같은 존재. 그것이 이경희 드라마의 또 다른 시작이다.

게다가 이렇게 끊어내려야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 위에 주인공들을 상처 입히는 또 하나의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고 없음이라는 양적 물증이 아니라, 이제는 그것이 사회적 신분처럼 고착되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규정하고 평가 기준이 되는 '돈'에 의해 재편된 인간관계가 그것이다.

촉망받던 의대생 강마루를 물질로 평가되는 세계 속에 자신을 던지는 욕망의 현신으로 변질시키는 건 결국 그의 불운한 가정환경이다. 가진 것 없는 주인공이 세상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아를 외면한 채 자본주의적 자아로 재편하여 기계인간과도 같은 존재로 거듭나는 건, 이경희 월드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차무원을 거듭 상처 주는 건 오들희의 숨겨진 자식이란 존재외에, 부잣집 사모님인 그녀로부터 쏟아지는 모멸이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의 차강진과 <참 좋은 시절>의 강동석이 냉혹해지는 지점은 구체적 상황은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결론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불균등한 부, 그리고 거기에 얹혀진 가족 관계로부터 상처받고 발톱을 드러내는 주인공. 그것은 이경희 월드의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피겨 같다는' 연출의 말처럼, 진짜 이경희 월드를 규정짓는 본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 냄새 풍기는 순박한 사람들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내걸었던 <고맙습니다>에서 세상에 상처받으며 아픈 딸을 가졌음에도 자신에게 던져진 운명을 원망하기보다, 그것을 품고 또 품으려 애썼던 이영신(공효진 분)으로 대표되는 캐릭터들이 그들이다.

단 2회지만, 10년 만에 돌아온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찬 동네 어귀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강동옥(김지호 분)으로 대변되는 바보 같은 사랑이, 그리고 잘 나가는 검사 아들 대신 못나고 부족한 동옥과 심지어 자신의 친아들이 아닌 동희(택연 분)를 부둥켜안고 사는 장소심 여사가 이경희 월드를 완성시키는 충분조건이다. 그들 역시 상처받지만 그 상처를 들고 울부짖기보다는, 가진 것 없어도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진실한 사랑의 힘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의 관계까지도 온전하게 일으켜 세우는 강인한 자존감, 그것이 이경희 월드의 주제 의식이다. 그들 덕분에 세상으로부터 상처받고 아파하는 주인공들은 결국은 발톱 대신 화해와 사랑으로 귀결되게 되는 것이다.

<참 좋은 시절>은 이경희 월드의 색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경주의 둥그런 고분을 배경으로 한 나지막한 도시의 라인처럼, 2014년을 이야기함에도 과거의 어느 시절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 그것은 비단 배경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2014년을 사는 주인공들임에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얽혀들게 되는 강동석 검사의 가족들처럼, 얼기설기 사람 냄새 풍기며 우르르 다가오는 가족들에게서 <왕가네 식구들>의 현실적 아비규환과는 또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마치 서울의 오래된 주택가를 지나가며 느끼게 되는, 분명 내가 지나가고 있는 곳임에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추억 속을 걷는 듯한 처연함을 <참 좋은 시절>에서 느끼게 된다. 아마도 이제는 점점 찾아보기 힘든 사람다운 훈훈함이 <참 좋은 시절>의 기조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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