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김수현 작가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그녀의 필력은 여전히 건재하며, 그녀가 집필한 드라마는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모든 작품에는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뭔지, 어떻게 살아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배어있다. 불륜을 담고 있든, 치정으로 치닫든, 동성애나 미혼모의 이야기를 다루던 간에 말이다.

김수현 드라마는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분류된다. 하나는 대가족을 구성하여 그 집단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아 가족애를 이야기하는 홈드라마 형식, 또 하나는 원톱 또는 투톱의 여자주인공을 내세워 남녀간의 사랑을 그리는 정통 멜로물. 김수현 작품들의 대부분은 이 두 가지 플롯 중 하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스타작가에게는 사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작가가 특별히 선호하는 배우 리스트를 말한다. 이는 캐스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김수현 작가 역시 김수현 사단이라는 리스트를 지니고 있으며, 작품마다 이 리스트를 근거로 하여 캐스팅 작업이 이루어진다.

작품이 홈드라마 형식일 경우, 김수현 사단의 움직임은 지극히 왕성해진다. ‘부모님 전상서’ ‘엄마가 뿔났다’ ‘인생은 아름다워’ ‘무자식 상팔자’ 등에서 그녀와 여러 편을 함께한 친구 같은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 바 있다. 강부자, 김용림, 이순재, 김해숙, 윤다훈, 김상중 등이 대표적인 배우들이며, 중견 배우들 외에도 몇몇 젊은 배우들이 김수현 사단의 명단에 올라 있다.

반면 김수현의 멜로드라마는 여자 주인공의 비중이 가장 크기 때문에 아무래도 김수현 사단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여기서도 김수현의 입김은 거세다. 여자 주인공 캐스팅에 있어서 김수현의 적극적인 참여도는 꽤 유명하다. 일단 자신이 추구하는 스타일과 맞아 떨어져야 하고, 연기력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잠재가능성이 보이는 여배우가 김수현 작가의 눈에 들어와야만 한다.

그러한 신중함이 드라마의 성공을 낳았다. 김수현이 선택했거나, 캐스팅에 동의했던 여주의 배우들은 작품으로 인해 엄청난 스타로 성장하거나, 연기파 배우로 거듭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대중에게 호감을 얻어 꾸준한 배우 생활을 하게 되는 혜택을 누려왔다.

‘청춘의 덫’의 심은하, ‘불꽃’의 이영애, ‘눈꽃’ ‘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 ‘천일의 약속’의 수애는 김수현의 작품을 통해 덕을 본 대표적인 여배우들이다. 물론 이들이 김수현 작가의 간택이 없었다 하더라도, 여배우로서 성공을 거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뛰어난 연기력을 광범위한 대역으로 넓혀 화려한 여러 색깔로 투영시키는 스펙트럼이 되어준 이는 분명 김수현 작가일 테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이지아는 이러한 수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은 배우다. 사실 이 작품은 그동안 김수현이 보여준 작품들과는 달리 약간은 모호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제목을 보면 정통 멜로물이 분명한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홈드라마 형식을 띠고 가족애를 그리는 부분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장르는 멜로물이다. 제목 그대로 세번 결혼하는 여자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며, 그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주인공 오은수(이지아 분)가 중심에 서 있고, 한때 영원한 사랑을 다짐했던 전 남편 정태원(송창의 분),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함께하고 있는 현재의 남편 김준구(하석진 분)가 양쪽에서 그녀를 붙잡고 있는 삼각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플롯을 기본 바탕으로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관을 건드리며 남녀간의 사랑을 주요 스토리로 그려내고 있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여주인공 이지아는 나름 엄청난 경쟁을 뚫고 오은수 역을 거머쥐게 되었다. 캐스팅 당시 여러 명의 여배우들이 물망에 올랐고, 누구로 낙점되었다는 뜬소문으로 설왕설래한 적도 있다. 캐스팅된 한가인이 대본 리딩 후 결국 최종 테스트에서 탈락한 사실은 김수현 작품의 여주인공 역을 따내기가 얼마나 까다롭고 힘든 것인지를 다시금 증명한 셈이기도 했다.

그런 치열한 우여곡절 끝에 선택된 이지아였다. 하지만 ‘세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이지아는 희미하다. 가장 눈부시게 반짝거려야 할 여주인공 오은수가 빛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분명 타이틀롤을 맡은 여주인공이며 이 드라마의 주축이 되는 인물인데, 그녀에게, 그녀의 연기에, 그녀의 이야기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극중에서 오은수는 조연 캐릭터들에게마저 어이없게 밀려나는 존재가 되었다. 절절한 사랑으로 시청자들의 눈물을 쏙 빼게 하는 기회는 그녀의 언니 오현수(엄지원 분)에게 빼앗겼고, 도드라진 개성으로 시선을 끌고 있는 이는 엉뚱하게도 정태희(김정난 분)다. 오은수는 하다못해 가정부 임실댁(허진 분)이 몰고 다니는 화제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무존재감 역할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지아의 연기력에 문제가 있다고 보이진 않는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다른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에 비해서 임팩트가 떨어진다는 점으로 이지아의 무존재감이 어쩔 수 없음을 설명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애초부터 이지아는 미스캐스팅이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 말이다.

이지아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는 평균 이하였다. 여주인공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배우가 그 자리에 들어섰을 때는 아무리 작품이 좋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성공하기가 어려운데, ‘세번 결혼하는 여자’는 그것을 애써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허울만 좋은 스타를 무조건적으로 캐스팅하지 않겠다는 김수현의 강단은 그녀를 멋진 작가로 만들어 주었고, 또한 멋진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인 듯하다. 때로는 대중이 원하는 스타를 주인공 자리에 앉혀 놓는 것도 작품의 질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니 말이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가 이대로 묻히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작품이라서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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