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험들은 사람을 그 경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런 강렬한 경험은 거창하지만은 않다. 우리 일상 속에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첫 음주를 통한 첫 알콜섭취나 첫 흡연으로 니코틴에 노출되는 경험 등이 그렇다.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들 중 카페인 즉 커피를 마신 것이 가장 최근 인생을 뒤바꾼 경험이었다. 적당히 즐기게 된 알콜과 전혀 즐길 수 없음을 알게 된 니코틴에 비해 내게 카페인은 단순히 기호식품을 넘어서 이제는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다. 맛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나의 뇌는 이제 그저 카페인이라면 좋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음료로서의 커피는 한참 어렸을 적에 이미 수차례 접했었다. 하지만 카페인은 몸에 나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의도적으로 커피를 멀리했고 웰빙이랍시고 커피보다는 녹차를 주로 마셨다. 그래서 커피를 즐긴다거나 커피가 꼭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직장생활을 하게 되고 이십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카페인의 강력한 기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아침 출근길에 눈앞에 뿌옇게 낀 안개 형태의 졸음을 걷어내지 못해 난처했을 때 캔커피 한 캔이 그 안개를 단번에 걷어버렸다. 그렇게 내 인생은 카페인을 "제대로 경험하기 전"과 "경험한 후"로 나뉘게 된다.
언젠가 잡지에서 커피의 기원과 역사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에티오피아 고원의 목동이 몰던 양들이 어떤 열매를 먹고 잠도 안 자고 밤새 뛰어노는 걸 보고 그 열매를 먹은 것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 주로 이슬람권에서 퍼져나가서 기독교인들은 이교도가 마시는 악마의 음료로 폄훼하고 멀리했다는 것. 결국 그 기능과 맛을 인정한 교황 클레멘스 8세(재위 1592~1605)의 축성을 통해 기독교권에서도 본격적으로 퍼지게 되었다는 것까지. 기사를 읽고 나니 즐겨마시던 커피 맛이 어쩐지 새로웠다. 그 기사 내용은 다른 커피 애호가들에게 "그거 알아요?"라고 운을 떼기에도 좋았다. 이렇게 상대방이 알든 모르든 간에 대화를 끌어나가기에 좋은 자잘한 지식들 덕에 커피와 카페인에 대한 애착은 더 깊어졌다.
<암스테르담의 커피 상인>(The Coffee Trader, 2003)은 이런 경험과 맥락에서 집어든 소설이었다. 커피가 유럽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던 1659년. 당시 유럽 무역과 경제의 메카였던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한 역사 느와르다. 작가 데이비드 리스는 추리소설을 즐겨읽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쯤 들어보았을 에드가 상을 첫 작품 <종이의 음모>(A Conspiracy of Paper, 2000)로 수상한 작가라니 커피라는 소재 뿐 아니라 역사 미스터리 장르 소설로서의 이 책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그렇게 <암스테르담의 커피 상인>(이하 커피 상인) 온라인 서점인 A사의 오프라인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커피 상인>의 주인공 미후엘 리엔조는 나처럼 성인이 된 시점에서 커피를 접하게 된다. 포르투갈 출신의 유대인으로 네덜란드에서 상인 노릇을 하다 사업실패로 빚 독촉에 시달리는 미후엘. 그는 자신의 상인으로서의 재능을 알아주는 부잣집 부인 게이트라위드가 커피 한잔을 내놓자 이렇게 말한다.
"악마의 오줌 같이 생긴 걸 보니 특별하긴 특별한 것 같은데, 이게 무슨 맛인지 알아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자 게이트라위드가 그의 팔에 닿을 만큼 몸을 앞으로 숙이며 말했다.
"한 모금만 마셔요. 그럼 내가 다 이야기해 줄 테니까. 악마의 오줌 같은 이것이 우리한테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 줄 거예요." 6p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사별한 남편에게서 한 재산 물려받았다 소문난 게이트라위드 부인의 추천이니 미후엘은 커피에 대한 거부감은 곧 호기심으로 바뀌게 된다. 게다가 이미 한 번의 사업 실패로 쓴 맛을 본 미후엘은 "엄청난 행운"이라는 말에 흔들린다. 하지만 미후엘을 실패로 몰아넣은 상품은 커피처럼 신대륙 브라질에서 온 상품인 설탕이었다. 설탕으로 재미를 보았다가 결국 설탕으로 낭패를 보았던 것이다.
한때는 미후엘도 이 부촌에서 뾰족한 박공 지붕을 인 제법 그럴듯한 빨간 벽돌 저택을 임대해 산 적이 있었다. 그런데 브라질 산 설탕의 생산량이 미후엘의 예상과 달리 급격히 증가했다. 향후 몇 년간은 설탕 생산량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에 기대를 걸었는데 느닷없이 브라질 농부들이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공급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설탕 가격이 추락했다. 그 바람에 거래소를 주름잡던 미후엘은 졸지에 남동생한테 빌붙어 사는 빚쟁이가 되고 말았다. 11p
미후엘은 선물 거래에 뛰어든 초기에 자신이 시장의 수요를 예측하는 초인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한때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서인도 상인들과 교류하면서 아주 좋은 가격에 설탕을 확보해 비싼 값에 되팔았다. (중략) 하지만 행운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많던 설탕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115p
게다가 커피 교역에는 여러 제약들이 있는데 가장 큰 제약은 역시 동양에 대한 무역독점권을 갖고 있는 동인도 회사다. 미후엘은 커피 교역으로 수입을 올려보자는 게이트라위드의 제안에 난색을 표시한다.
"커피 원두 거래는 동인도 회사(17세기 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동양에 대한 무역독점권을 부여받아 동인도에 설립한 여러 회사-옮긴이) 소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한테서 권리를 빼앗을 방법이 없습니다. 당신이 무슨 제안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나도 몰라요!" 26p
하지만 사업 실패로 쪼들리는 자신에게 사업자금을 대어주겠다는 물주의 강력한 추천도 있고 일단 커피를 마시고 난 뒤 신체가 보이는 어떤 변화를 감지한 미후엘은 추천 상품에 대한 더 정확한 정보를 찾아나선다.
미후엘은 신경 써야 할 중요한 일이 많았지만 암스테르담 서교회의 책장수한테 들러 커피의 장점을 극찬한 영국 소책자의 번역본을 찾아냈다. 소책자의 저자는 게이트라위드의 칭찬이 무색할 정도로 커피를 칭송했다. 그는 커피가 영국에 존재하는 모든 질병을 치유했다고 적어놓았다. (중략) 그밖에도 영국인 저자는 커피가 이성과 집중력을 놀라울 정도로 향상시킨다고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커피의 신비로움을 취하는 자와 경쟁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69p
영국인 저자의 극찬까지는 아니지만 잠이 줄어들고 몸에서 활력이 솟으며 판단이 명료해지는 것을 감지하던 미후엘은 어렵게 마련한 자금으로 고래기름 선물 거래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주는 커피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한 손에 영수증을 움켜쥐고서 미후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확하게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냈다. 지금껏 거래하느라 흥분한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오늘처럼 거래의 흐름이 눈에 정확히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격이 바뀔 때마다 그 흐름은 방향이 바뀌었지만, 신비로운 커피를 마셔서 정신이 예민해진 사람이 유심히 관찰하기만 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흐름이 바뀔 것인지 쉽게 점칠 수 있었다. 이제 미후엘은 자신이 과거에 왜 실패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37~138p
증권 거래소의 숫자와 그래프가 없던 그래서 상인들이 주문하는 수량과 가격만 듣고 판매를 결정하던 시절. 순간의 결정이 이익과 손해,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 짓는 ‘거래라는 이름의 한판 승부’에서 미후엘은 커피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4분의 1톤당 53길더로 12.5톤을 사겠다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이다! 커피가 소리쳤다. 팔아버려!
"12.5톤이오!"
미후엘이 크게 소리쳤다.
"4분의 1톤당 53길더 반이오."
(중략)
미후엘은 가슴이 뛰었다. 주위에서 가격 덜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숨까지 거칠어졌다. 50길더로 가격이 떨어지더니 그 다음에는 48길더, 44길더로 떨어졌다. 미후엘은 딱 알맞은 순간에 팔았다. 몇 초만 늦었어도 수백 길더를 손해 볼 뻔 했다. 그를 괴롭히던 의심과 불안과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위대한 랍비가 토라를 통해 마귀를 물리치듯 미후엘은 커피를 통해 불안과 의심과 혼란을 물리쳤다. 138~139p
졸음과 무기력함을 몰아내고 집중력을 높여주는 커피의 위력을 실감해온 입장에서 매우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물론 믹스커피라는 아이템을 통해 카페인이 만연한 우리에게는 날개를 펼쳐준다는 레X불 정도의 카페인 기반 에너지 드링크는 되어야 저런 표현이 우러나오겠지만 커피의 존재자체가 낯설던 17세기 유럽인에게는 커피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렇게 카페인이 주는 흥분 상태 속에서 "시장의 수요를 예측하는 초인적 능력"을 되찾아 성공을 거두게 된 미후엘은 커피의 중독자이자 신봉자가 된다. 그리고 여전히 커피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하는 유럽 시장에 대량의 커피를 들여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대량의 커피를 유럽 시장에 들여오게 되면 커피값이 하락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선물 거래소에서 커피 가격의 하락에 돈을 거는 풋옵션을 구입한다.
풋옵션이란 "나중에 A라는 것을 매도할 수 있는 권리를 지금 사는 것"이다. 미후엘의 계획은 이렇다. 일단 커피 가격이 낮아지면 이득을 볼 풋옵션을 미리 구입해두고 자신이 커피를 대량으로 수입해서 커피 가격을 낮춘다. 자신은 풋옵션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커피는 낮은 가격으로 유럽에 유통된다. 하지만 커피의 위력 때문에 다시 커피 값은 상승하게 될 것이다. 그 전에 풋옵션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커피를 다시 사들여 커피 가격이 오르면 다시 팔아서 이익을 보겠다는 것이다.
17세기 국제 무역의 중심지가 된 암스테르담에는 이런 선물 거래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미후엘의 커피 거래에 게이트라위드처럼 돈을 투자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알론조 알페론다가 처음으로 부를 축적하게 된 곳도 선물 거래소였다. 아래는 알페론다의 증언이다.
주머니에 동전 몇 푼만 가지고 암스테르담에 온 나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는데 오래지 않아 내가 좋아할 만한 일을 찾아냈다. 선물 거래소라는 곳에서는 아무도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않고 또 가지려고 생각도 안 하는 물건들을 서로 팔고 사는 새로운 형태의 장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물 거래'라고 하는 이 장사는 상품 가격이 상승할지 하락할지를 미리 점쳐 돈을 거는, 거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상품 가격의 변화를 제대로 예측하기만 하면 팔거나 산 가격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당장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잘못 예측하면 자신이 투자한 돈뿐만 아니라 자신이 산 가격과 최종 가격의 차액까지 빚을 지기 때문에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45p
하지만 암스테르담에는 미후엘의 이런 야심찬 계획이 성공하도록 방치하지 않을 자들이 넘쳐났다. 그것도 같은 유대인 동포들이. 암스테르담 내 유대인 공동체 마아마드의 위원(파나스)인 파리도는 자신의 거래를 망쳐 경제적 손실을 주고 덤으로 사적인 모욕까지 준 미후엘을 잔뜩 벼르고 있다. 미후엘은 사소한 오해라고 항변하지만 미후엘에 대한 파리도의 원한은 너무나 깊어 수시로 미후엘을 파멸시킬 궁리를 한다. 그 파멸의 방식은 바로 암스테르담 내 유대인 공동체에서 미후엘을 파문을 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암스테르담을 제외하고 유럽 전역에서 출신 때문에 불이익을 겪었던 유대인들의 처지가 얽혀있다. 다음은 알론조 알페론다의 고백이다.
나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유대인으로서 기도하는 것이 금지된 유대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새로운 기독교인' 또는 콘베르소스라고 불렸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조상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재산을 포기하든지-대부분의 경우 목숨까지도 포기해야 했다-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고,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고문을 당하고, 몰락하고, 죽음을 당하는 신세를 면하기 위해 우리는 남들 앞에서는 천주교인처럼 굴었지만, 어둠 속에서 그리고 지하실에서, 이 집 저 집으로 비밀 회당을 옮겨 다니며 유대교를 지켰다. 31p
알페론다처럼 미후엘도 포르투갈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유대인 집안 출신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미후엘의 아버지는 알페론자 집안과는 달리 완벽한 개종자의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미후엘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유대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내 조부모는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개종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분들의 선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미후엘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다는 쾌감과 위험한 짓을 한다는 쾌감과 위험한 짓을 한다는 쾌감 때문에 어려서부터 몰래 유대교 전례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36p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출신을 지워버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던 미후엘의 아버지는 어처구니없는 운명의 장난에 휩싸인다.
미후엘이 암스테르담에서 터전을 닦을 동안 그의 아버지와 동생은 리스본에서 와인과 무화과, 소금 수입을 계속했는데, 종교 재판관이 미후엘의 아버지를 체포하면서 리엔조 집안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당시 포르투갈 법은 종교 재판소에서 유죄를 선고한 자의 재물을 교회가 마음대로 몰수할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돈 많은 상인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문 기간 중에 갑자기 숨을 거둔 미후엘의 아버지가 사후에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그의 사업도 중단 명령을 받았다. 자신의 명의로 거래하던 물품이 몇 가지 안 되던 다니엘은 어쩔 수 없이 리스본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형과 대규모 콘베르소스 탈출 행렬을 따라 암스테르담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38~39p
포르투갈에서 상인으로써 쌓아올렸던 리엔조 가문은 종교재판으로 와해되고 미후엘과 동생 다니엘은 암스테르담에 새둥지를 틀게 된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상당한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 마아마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마아마드는 암스테르담으로 온 미후엘을 환영했다. 마아마드의 교사들은 미후엘이 성스러운 히브리 어를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전례와 축일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카타리나(미후엘의 사별한 부인)를 잃은 슬픔 때문에 여전히 괴로웠지만 네덜란드에 온 처음 몇 주 동안은 신세계에 왔다는 기쁨과 유대교를 자유롭게 배울 수 있다는 기쁨으로 내내 들떠서 지냈다. 할례에 대한 기억조차도 자주 떠올리고 싶지는 않지만 감동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마아마드의 도움을 받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아마드를 구성하는 위원인 파나스들은 독재적인 권력을 휘둘렀고, 유대인 공동체 안에 사는 사람은 마아마드의 법률을 따라야 했고 그러지 않으면 파문당했다. 39p
마아마드에서 파문을 당한다는 것. 타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공동체로부터 쫓겨난다는 것은 특히 그 공동체의 인맥에 기대어 사업을 하는 이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다. 미후엘의 적인 파리도에게 이미 파문당한 바 있는 알페론다는 마아마드의 파문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기독교 독자들에게는 헤렘, 즉 파문이라는 것이 포르투갈 출신 유대인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들 것 같다. 종교 재판소의 박해를 받거나 유대교를 불법화했던 영국과 같은 나라 또는 어쩔 수 없이 유대교를 허용해주었던 이슬람교도들의 도시에 살았던 유대인들에게는 암스테르담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자유롭게 종교 모임을 가질 수도 있고, 유대교 축일을 기념하고 의식을 따를 수도 있고, 밝은 대낮에 경전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중략) 우리는 유대인이며, 유대인인 우리에게 한 사람의 신분과 소속감을 말살할 수 있는 마아마드의 권력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120p
마아마드는 가장 치명적인 파문을 비롯해 여러 가지 처벌을 공동체 내 유대인들에게 내린다. 그 처벌의 근거는 유대인들이 지켜야할 것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율법을 어기는 자들을 적발해내기 위해 마아마드는 의심가는 이들에게 첩자를 붙인다. 특히 미후엘 같은 상인들에게 첩자들이 주로 붙는다. 미후엘은 커피 거래를 추진하면서 그런 첩자들을 수시로 만나게 된다.
네덜란드 남자는 수염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고 모두 민다. 저렇게 수염을 기르는 것은 유대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유대인 남자뿐이다.
미후엘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들은 마아마드의 첩자가 분명했다. 221p
마아마드는 왜 상인들에게 첩자들을 붙이는가. 그것은 유대인 상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거래를 막기 위한 법률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의 공민들은 유대인 상인이 비유대인을 위해 중개 업무를 하지 못하도록 금지했고 마아마드도 그런 행위를 한 유대인에게 파문형을 내렸다. 하지만 그 법률은 이 도시에서 두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위반하는 법률이라는 것이 미후엘의 생각이었다(가장 많이 위반하는 법률은 중개인이 고객의 이익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일 터였다). 100p
미후엘의 커피 거래 역시 따지고 보면 비유대인인 케이트라위드 부인을 위한 중개업무인 셈이다. 하지만 미후엘은 이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쳐야 경제적, 사회적으로 회생할 수 있다. 그리고 미후엘이 커피 거래를 통해 회생을 노린다는 소식을 접한 파리도는 마아마드의 위원 자리를 이용해 미후엘이 비유대인과 거래한다는 사실을 적발하여 마아마드에서 파문시키려 한다.
파리도 덕에 파문의 위협을 수시로 느끼면서도 미후엘은 커피 거래를 진행한다. 그리고 파리도가 쳐놓은 함정들이 드러난다. 파리도뿐 아니라 동업자라 믿었던 이들의 배신까지 감지된다. 이런 위험 속에서 겨우 파산에서 벗어나 비유대인의 돈으로 사업을 하려는 미후엘이 이미 성공한 상인이자 마아마드의 의원인 지역 유지 파리도에게 대적하는 것은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이 승부에서 미후엘은 자신만만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자신의 근거가 조금은 서글프다.
"나는 그럼 생각 안 한 줄 아나? 파리도는 살로니카 출신이고 나는 포르투갈 출신이야. 그자는 유대인으로 자랐지만 나는 천주교도인 척하며 자랐네. 그러니까 남을 속이는 재주에 있어서만큼은 그자는 절대 내 상대가 될 수 없어." 135p
포르투갈에서는 종교재판의 유죄판결을 피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겨왔고 암스테르담에서는 마아마드의 파문을 피해 비유대인과의 거래를 숨겨야만 하는 서글픈 운명의 미후엘. 하지만 이미 이런 운명을 받아들인 그는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기만을 서슴지 않는 타고난 상인이다. 그래도 선인과 악인 없이 모두가 경쟁자요 이익추구자인 인물들 사이에서 독자가 미후엘을 미워하지 않고 지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단순히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라 17세기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으로써 겪는 순탄치 않은 운명 때문이기도 하다.
대미를 장식하는 미후엘의 커피 거래 결과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커피가 유럽으로 대량 유통 된 뒤 세계는 그 전의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다. 그리고 미후엘의 이 대담한 도박은 저자의 글(499p)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상업의 거의 모든 형태"가 존재했다고도 할 수 있는 "17세기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미후엘이 던지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즐기면서 독자는 현대 상업과 경제의 근간인 주식회사, 상품 시장, 선물 거래, 주식 거래 및 갖가지 투기적 거래의 초기형태와 작동원리를 접할 수 있다.
한때 스페인 식민지에서 유럽 무역의 중심지로 거듭난 네덜란드의 역사적 배경도 이야기에 잘 스며들어있다. 종교적으로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주교도뿐아니라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배척받고 박해받는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커피를 좋아한다면 또 유럽의 역사에 흥미를 갖고 있다면 이 소설은 여러 마리의 새를 한 번에 잡을 수 있는 쓸 만한 돌이다.
<커피 상인>의 단점이라면 책도 두껍고 글씨도 작아 분량이 만만찮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많은 분량은 여러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꼬여있는 복잡한 기만과 음모들로 채워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흥미진진하지만 복잡한 내용보다는 단순한 원인과 결과가 주는 명쾌함과 거침없는 전개를 즐기는 독자 중에서는 지쳐 나가떨어지는 이들이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미후엘이 경험했던 것처럼 진한 커피 여러 잔과 함께 이 책을 읽는다면 얽히고 섥??복잡한 음모와 배신의 거래 내역이 결국 한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절판된 책에 대해 쓴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검색 결과 중고 시장에 이 책의 물량이 적지 않음을 확인했다. 나 역시 온라인 서점 A모사의 오프라인 중고책방에서 이 책을 구입했으니 흥미가 있다면 손에 넣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설마 이 글 때문에 이 책을 찾는 사람이 많아져서 중고시장에 이 책이 사라질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최원택

드라마 잡지 <드라마틱>과 장르소설 잡지 <판타스틱>의 기자를 거쳐 책 만드는 일을 하다가 곧 자유낙하가 멀지 않은 자유기고가가 되었다. 허영에 휘둘려 책장을 넘기고 마우스를 클릭하다가 깜냥을 확인하는 것도 우직하게 반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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