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의 대가치고는 너무나도 혹독했다.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 분)은 전날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다. 이튿날 깨어나 보니 손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영문도 모른 채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원래 솔로몬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다. 연주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올라온 술자리 다음 날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흑인인 솔로몬이 자유인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자유인 증명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는 워싱턴 사람이 아닌 뉴욕 사람이다.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된 마당이라 뉴욕에 가서 자유인 증명서를 갖고 올 수도 없으니 솔로몬은 영락없이 남부에 노예로 팔려갈 신세로 전락한다. 이름도 솔로몬 노섭이란 자신의 이름도 쓸 수 없다. 플랫이라는 새로운 노예명을 쓰고 살아야 한다.

<노예 12년>은 자유인으로 살다가 부지불식간에 노예의 삶을 살게 된 한 남자의 불행한 이야기를 그린다. 플랫이라는 새로운 이름은 솔로몬에게 ‘노예’라는 정체성을 덧입힌다. 그가 계속 자유인으로 남았더라면 플랫처럼 터무니없는 이름은 가명으로라도 쓸 일이 없다. 하지만 솔로몬에게 가해지는 구타와 인신매매범의 모욕적인 발언은 솔로몬을 자유인으로 놓아두는 게 아니라 자유인이라는 정체성을 노예로 뒤바꿔 놓는다.

노예 상인 혹은 인신매매범 때문에 자신이 바라지 않던 노예라는 정체성을 덧입는 솔로몬의 처지는 <변호인> 속 진우(임시완 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진우는 평범한 대학생이지 급진적인 좌익운동을 펼치는 학생이 아니었다. 이는 솔로몬이 뉴욕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시기와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진우는 공안 경찰이 불온서적으로 간주하는 서적을 갖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영문도 모른 채 경찰서로 끌려간다. 불행하게도 진우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고문을 당한다. 마치 <노예 12년>의 솔로몬이 인신매매범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노예 상인 프리먼(폴 지아마티)에게 따귀를 맞는 것처럼 말이다. 진우의 등과 솔로몬의 등은 공통점을 갖는다. 진우의 등은 공안경찰에게 두들겨 맞는 바람에 퍼렇게 멍이 들고, 솔로몬의 등은 인신매매범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바람에 흉터가 역력하게 남는다.

진우는 수건을 뒤집어쓴 채 김치 국물을 얼굴에 들이붓는 물고문을 당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공안 경찰이 진우에게 강요하는 ‘나는 빨갱이입니다’라는 거짓 진술서를 억지로 작성해야만 한다. 국밥집 사장 최순애(김영애 분)의 아들, 혹은 대학생이라는 진우의 정체성이 공안 경찰의 용공 조작으로 인해 ‘빨갱이’로 탈바꿈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노예 12년>에서 솔로몬이 인신매매범의 강압과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플랫이라는 노예의 이름을 받아들이며 노예라는 거짓된 정체성으로 12년을 살아야만 하는 억울함과 매치되기에 충분하다. 진우와 솔로몬은 폭압적인 세력에 의해 자신이 원하지 않은 ‘빨갱이’ 혹은 ‘노예’라는 정체성을 대학생 혹은 자유인이라는 원래의 정체성과 맞바꾸게 되는 폭압의 희생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누가 이 두 남자의 억울한 사연에 귀를 기울여 주었나. 송우석(송강호 분) 변호사가 진우 엄마 최순애의 억울한 사정을 나 몰라라 한 채 세법 변호사로 이익만 추구했다면 부자는 되었을지 몰라도 인권변호사로서의 거룩한 발길은 떼지 못했을 테다. 억울한 자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송우석과 같은 이가 없었다면 <노예 12년> 속 솔로몬도 죽을 때까지 노예로 남아있지 않았겠는가. 힘없고 약한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한 최고의 미덕이라는 걸 <노예 12년>과 <변호인>은 보여주고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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