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곰인 어네스트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거리에서 풍각쟁이로 활동하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고 건네주는 돈이 아니다. 치안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목으로 벌금 딱지가 날아드는 건 어네스트가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게 아니라 불안정한 수입에 의존한다는 걸 의미한다. 만일 그가 먹을 걸 살 충분한 돈이 있었다면 어네스트는 거리의 악사를 자청하지 않았을 테다. 어네스트는 곰의 세계에서 돈을 버는 주류 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돈이 충분치 않은 비주류 구성원이다.

생쥐 소녀 셀레스틴 역시 생쥐 사회에서 주류가 아니다. 생쥐 사회에서 인정받으려면 셀레스틴 또래의 생쥐들은 많은 이빨을 곰의 세계에서 가지고 와야 한다. 생쥐의 세계는 토목의 세계다. 지하 세계를 건설하려면 땅 속에서 굴을 파고 또 파야 한다. 그러자면 생쥐의 튼튼한 이빨이 한 몫 한다. 하지만 이빨은 닳는다. 닳은 생쥐의 이빨을 대신할 수 있는 건 땅 위에 사는 곰의 이빨이다.

곰의 이빨을 많이 가지고 오면 이빨이 닳은 생쥐에게 새로운 이빨을 만들어줄 수 있다. 한데 셀레스틴은 또래 생쥐보다 많은 이빨을 가지고 오지 못한다. 때문에 생쥐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어네스트가 곰의 세상에서, 셀레스틴이 생쥐의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지 못하고 이빨을 많이 갖고 오지 못한다는 설정은 이들 주인공이 주류가 아닌 비주류라는 걸 보여준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라는 애환 외에도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에게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 그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한다는 어려움이다. 어네스트는 음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家業)인 법조인이 되라는 강요를 받으며 살았다. 셀레스틴 역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지만 자신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치과의사가 되어야 하는 미래를 가져야 한다.

자신이 가진 재능과는 상관없이 법조인이나 치과의사가 되어야 하는 어네스틴과 셀레스틴의 이야기는, 어린이나 청소년의 꿈이나 재능과는 상관없이 부모의 바람대로 미래를 직조해야 하는 현실의 교육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어른의 바람대로 아이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가치관의 강요를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이라는 가공의 캐릭터를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셈이다.

수박은 동그랗게 자라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수박을 네모난 틀에 넣고 키운다면 틀 속의 수박은 네모난 수박으로 자라난다. 아이들의 꿈을 어른들의 바람대로 구겨 넣고 미래의 직업을 강요한다면 그 아이가 얼마만큼이나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라난 아이는 자신의 자아를 직업을 통해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바람대로 자라나고 직업을 갖는 부모의 아바타에 불과할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바람대로 자라는 아바타가 아니라는 걸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은 따스한 우화에 담고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