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실명으로 나오진 않지만 뉴스와 담을 쌓고 살지 않는 이상에야 <또 하나의 약속>이 무엇을 다뤘는지는 아실 겁니다. 바로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가 백혈병 혹은 다른 희귀질병에 걸려서 투병 중이거나 이미 사망한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의 약속>과 <변호인>

<또 하나의 약속>은 실제로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故 황윤미 씨의 가족, 특히 딸을 잃고서야 대기업에 치를 떨면서 맞서 싸웠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영화입니다. <또 하나의 약속>이 재연하고 있는 바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 또는 "다윗 VS 골리앗"의 싸움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게만 보였던 약자가 결코 물러서지 않고 맞서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일종의 영웅담입니다. 다만 이 영웅담은 주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는 미화와 일방적인 찬양 투성이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또 하나의 약속>은 엄연히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지금도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는 비극을 의연하게 담고 있다는 데서 바로 우리의 이야기로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로나마 <또 하나의 약속>에서는 몇 가지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삼성이라는 거대기업의 부정과 횡포를 다룬다는 것에서 이 영화는 제작 초기부터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자칫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도처에서 십시일반 제작비를 지원하여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약속>은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한 영화고, 그 분들만이 그나마 영화를 떳떳하게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기어코 1,000만 이상의 관객을 돌파한 <변호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영화는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 외에도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변호인>의 리뷰에서 역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약속>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을 보기 바랍니다.

<변호인>을 통해 진우를 만나기 이전의 우석에게서 자신을 보고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했던 것처럼, <또 하나의 약속>에서는 딸이 죽고서야 통탄하고 분노했던 상구를 거울에 비추고 절실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상구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하며 무지한 기성세대의 상징에 다름 아닙니다. 일례로 도입부에서 상구는 딸의 회사에 노조가 없다는 것을 두고 '참 좋은 회사'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삼성은 과거에 노조가 없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이것을 다른 회사와 대조하면서 마치 결점 없는 기업인 것처럼 포장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정말 삼성은 그런 기업이었을까요? 삼성이 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어떤 짓까지 불사했는지 폭로하기 전까지는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상당수였습니다.

우리가 발병시킨 백혈병

제가 삼성에 입사했을 때, 그리고 쳇바퀴를 돌리는 삶이 싫어 그만둔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뭔지 아십니까? "청소부로 일해도 삼성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희한하게도 갈수록 천민자본주의가 심화하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작금의 대한민국은 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한들, 아직까지도 기성세대에게 삼성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지금도 "삼성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맹목적인 논리로 그들의 부정을 기꺼이 무마하고 외면하려는 것이 엄연히 기성세대가 일군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작태가 "대학에 보냈더니 데모질이나 하고 자빠졌다"고 비아냥거리던 <변호인>의 송우석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입니까.

<또 하나의 약속>을 보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기성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상영관을 나오면서 "삼성 개새끼" 따위의 욕을 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고 자책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약속>에서 상구는 딸에게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원망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좋은 회사 다닌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니던 아빠에게 어떻게 말해!" 그리고 누나가 죽도록 방치하고도 파렴치하게 굴었던 회사에 들어가서 근무하는 아들을 붙잡고 호통을 쳤을 때도, 그는 "누나를 죽인 건 결국 아빠"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딸을 잃고 뒤늦게 후회했던 상구처럼 본의든 아니든 우리는 그렇게 썩어가는 세상을 방치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비록 <또 하나의 약속>이 특정 사건을 조명하고 있지만, 이것은 비단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고 삼성에서 근무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어간 분들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불의를 보고서도 침묵하거나 심지어 그것이 불의인지조차도 몰랐던 바로 우리의 비겁했고 무지했던 과오가 이와 같은 현실을 낳았다는 걸 직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또 하나의 약속>의 삼성은 곧 대한민국이고, 백별형은 우리의 무관심이 발병시킨 이 사회의 병폐입니다. 무식은 죄가 아닐지언정 그것이 자신의 침묵과 동조를 정당화해주는 면죄부로 내세워선 안 됩니다. 특히 "나와는 무관한 일"로 치부하고 관심조차 갖지 않으려고 하면서 다분히 자의로 무지를 초래했던 사람이라면, "세상의 부정과 부패는 내 탓이 아니다"는 사고를 반성해야 합니다.

비겁한 기성세대

어렸을 적부터 상습적으로 들었던 기성세대의 조언이 바로 "도전은 청춘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모 작가의 책인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그것을 재차 대변하고 있는 제목에 다름 아닙니다. 정녕 도전의식은 젊은 세대가 당연히 가져야 할 의무고, 반대로 온순하게 사회에 적응하면서 안주하는 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일까요? 노량진 학원가가 해를 거듭할수록 번성하고 있는 것을 두고 대학생들을 비판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자답하자면 "네, 맞습니다"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기성세대는 그와 같은 청춘을 나무랄 자격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의식 있는 기성세대라면 그 전에 먼저 젊은 세대에게 사과하고 용서부터 구해야 합니다.

"사교육 때문에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부기기수라는 건 대한민국이 빠진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정작 그런 사람조차도 자기 자식을 사교육에 찌들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기러기 아빠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청소년으로부터는 자유와 선택권을 박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불평과 불만을 토하고 있는 사회를 잠자코 따르라고 가르치면서 고스란히 대물림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도 젊은 세대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왜 도전하지 않느냐고 나무라거나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는 <또 하나의 약속>의 상구를 존경해야 합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니 끊임없이 도전하라"는 것은 기성세대의 책임회피고 자기합리화입니다. 저 말의 이면에는 "나이가 든 우리는 도전할 수 없으니 너희가 세상을 바꿔다오"라는 기성세대의 무기력과 무책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드는 데 일조한 우리는 왜 아무렇지 않게 계속해서 방관자에 머무르려고 하나요? 이 사회를 좀먹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걸 언제까지 부정할 것인가요? 불의와 맞서 싸우지 말고 타협하면서 정의를 돈으로 환산하여 천민자본주의를 실천하라고 가르친 게 우리라는 건 아시나요? 설마 모르신다면 반드시 <또 하나의 약속>을 보시길 권합니다. 당신들의 자녀를 죽음으로 몰아놓고 있는 것이 그 누구도 아닌 우리라는 걸 똑똑히 보시기 바랍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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