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에서 레고의 본사가 있는 빌룬트에 들렀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레고 랜드도 방문했습니다. 거기서 미처 몰랐던 레고의 위용을 봤습니다. 종종 "레고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한 조립품을 봤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건 또 달랐습니다. 레고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하다는 걸 깨달았었지만, <레고 무비>는 그것마저 뛰어넘었습니다.

<레고 무비>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제목 그대로 레고를 가지고 만든 스톱모션 영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건 사실입니다. <레고 무비>가 레고와 CG를 혼합하여 스톱모션으로 제작한 영화라는 건 틀림없습니다. 심지어 물, 화염, 연기 등도 모조리 레고 부품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작진의 노고에 감탄하는 한편으로 다소 눈이 피곤하고 산만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걸 차치한다면 <레고 무비>는 거의 경이적입니다. 이 영화에서 정작 제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은 건 레고로 완성한 영상이 아닙니다. 그 영상으로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가 <레고 무비>의 핵심입니다.

워너 브러더스가 제작사인 영화답게 <레고 무비>는 각종 영화와 만화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도입부만 하더라도 주인공은 이 좋은 세상에서 늘 웃으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자기최면을 걸지만, 실은 그 세상이 한 거대 기업의 대표가 일삼은 세뇌와 통제로 인해 돌아가고 있다는 설정은 <매트릭스>에서 가져왔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밖에도 중간중간 <인디펜던스 데이> 등의 영화가 보이고 덤으로 배트맨, 슈퍼맨, 그린 랜턴, 원더우먼 등의 DC 히어로 캐릭터가 다수 나타나 주인공을 돕습니다. 덕분에 관객으로서는 <레고 무비>를 보는 재미가 한층 더해졌습니다. 워너가 제작하는 바람에 마블의 히어로 캐릭터는 볼 수 없는 게 아쉽지만요. (레고는 마블과 DC 캐릭터 사용권을 모두 라이센스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둘을 동시에 보유한 건 매우 드문 것으로, 그만큼 레고의 영향력과 인기가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볼거리를 보유한 동시에 <레고 무비>는 레고의 철학과 가치를 고스란히 이야기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레고의 제품이 가진 특성, 즉 한계와 틀에 얽매이지 않고 획일과 몰개성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어른들은 그것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장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제품홍보를 위한 철학적인 광고와도 같지만, <레고 무비>는 이 이야기를 가볍지 않으면서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어 밉지가 않습니다. 결말부에 깜짝 등장하는 두 명의 캐릭터는 레고가 현실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과 의미마저 보여줄 정도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레고에 대해 좀 알거나 친숙하다면 <레고 무비>를 보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추억에 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레고 무비>는 <토이 스토리>의 뒤를 이어서 장난감을 진지하게 고찰하고 다시 보게 하는 영화입니다. 다만 대사로 추구하는 개그 코드와 상황 연출, 카메라 워크, 일부 이야기 등이 전형적인 미국 시트콤과 고전적인 티비 애니메이션에 가까워 보여 우리나라에서도 먹히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반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달리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스톱모션의 특징과 한계도 관객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보면 레고 시장에서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북미 박스 오피스에서는 기대 이상의 돌풍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만큼 노골적이면서도 밉지 않은 기업(제품)홍보영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레고 무비>가 유일할 것입니다.

★★★★

덧) 개봉도 하기 전에 워너는 속편을 기획했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가 했지만 보고 나니 수긍하게 되네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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