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알.이.씨 [●Rec]
DIRECTOR : 자움 발라구에로, 파코 플라자
ADDITION : 2007 | 78분 | 스페인
출연 : 마누엘라 벨라스코 外

(스포일러를 아는 여부가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들을 애호하는 데 있어서 그닥 심급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스포일러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1. 바야흐로 좀비영화의 전성시대다.

윌 스미스가 달랑 애완견 한마리를 동반하고 사투를 벌이던 <나는 전설이다>, 동시상영 B급영화의 유통과 로망 두 외연을 공히 패러디하며 고름 흘리는 좀비떼를 등장시킨 <플래닛 테러>, 괴바이러스가 발생한 아파트에 리얼리티 프로의 제작진이 갇히면 어떤 그림이 나오는 지를 체험시켜주는 <[●Rec]>, 그리고 좀비 영화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조지 로메로의 <랜드 오브 데드> 등등이 이미 개봉했거나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대학로에서는 좀비를 소재로 다룬 뮤지컬 <이블 데드>가 장기공연에 들어갔다.

한편, 소심한 성격상 극장에서 호러 구경을 택하길 꺼려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좀비 트렌드를 체감시켜주는 케이블TV 채널들의 편성. 우주정거장에 파견됐다가 괴물에 감염되기 시작하는 미 해병대를 다룬 <둠 Doom>, 벌목회사와 환경단체가 대치하던 중 유전자 조작된 나무 수액으로 한 명 한 명 좀비가 되기 시작하는 <서비어드> (* 소비자의 착시를 노리기 위해 <데드캠프2> 라는 수입제목이 바뀌어 방영됐다), 조지 로메로 영화를 유쾌하게 오마주한 워킹 타이틀의 코믹 호러 <새벽의 황당한 저주>, 그리고 아마도 설명이 필요 없을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등등이 손에 손잡고 재방 중이다.

#2. 이 라인업에 넣기도 그렇고 빼기도 그런 영화가 닐 마셜 연출의 영국 영화 <둠스데이>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발생, 여기 감염된 사람들은 몸에서 상처와 출혈이 발생하다 결국 장기가 녹으면서 쓰러진다. 그 감염의 양태와 증후가 좀비의 그것과 같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한 번 죽은 숙주가 다시 부활하여 어슬렁거리진 못한다는 점. 마니아의 입장에서 장르를 따지자면 좀비물의 범주에 등재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게 그리 간단치 않다.

기실 ‘좀비’라는 개념 자체가 이항대립의 사고, 즉 존재를 ‘있다/없다’ 혹은 ‘살았다/죽었다’ 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전제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 아닌가. 사람도 시체도 유령도 괴물도 외부도 내부도 아닌 설명 불가의 존재로서의 좀비가 그 장르의 규칙 그대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되,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증상과 확산 양상이 좀비물의 설정들과 비슷하며, 그 대처방안으로 ‘격리’와 ‘원거리에서의 총격’, ‘백신의 개발’ 등등의 기제가 사용된다는 점 등등이 이 영화를 최근의 좀비 영화의 흐름 중 하나로 읽게 만든다. (물론 80년대 매드맥스 시리즈나 존 카펜터의 액션 영화, 또는 그밖에 핵전쟁 따위가 벌어진 후 사이코 광신 커뮤니티와 상식을 저버리지 못한 사람들의, 또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다룬 모든 액션영화들의 장면을 작정하고 대출한 편집물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좀비 영화들의 프롤로그에 과거의 선배들이 굳이 다루진 않던 ‘감염 초기 공권력의 대처방안’ 이 꼬박꼬박 등장하고 있다는 점.

가령 조지 로메로의 ‘Dawn of the dead’, ‘Day of the dead’ 등의 시리즈를 보면 이미 좀비가 창궐하고 있는 시점에서 영화를 시작한다. 그 시점에서 몇몇 고립된 이들의 분투나 적응하는 과정이 영화의 시작과 끝. 이 설정에는 “공권력은 이 파상공세 앞에서 애초에 속수무책일 것이다” 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듯 하다. 과거 좀비 영화들의 감염 원인에 방사능 유출이나 핵전쟁 등 어떤 불가항력에 대한 공포가 암시되는 것이 한 증거.

반면, 요새의 좀비물들은 위에 말했듯 군대나 경찰의 ‘신속하고 엄정한, 그래서 무척 폭력적인’ 초기 대처를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여기서 ‘공권력의 임무’는 재난과 맞서 싸우거나 그 원인을 발본색원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문제가 발생한 지역을 최대한 빨리 격리하고 감염이 예상되는 시민을 초반 처치하는 데 있다.

<나는 전설이다>에서 군인들은 뉴욕을 탈출할 순서를 선착순 보다는 계급에 따라 (가령 영관급인 윌 스미스의 가족은 수혜를 입지만 다음 재난이 기다린다거나) 구분, 통제하는 미션을 수행하고, <둠 Doom>의 ‘우리 편’ 전사들은 우주정거장과 지구의 차원 통로를 봉쇄하는 전술을 택한 후, 감염 여부가 불분명한 시민들까지 죄다 사살한다.

<둠스데이> 초반 영국 정부의 전략은 더 노골적인데, 아예 감염지역과 런던을 격리하는 철벽의 ‘산성’을 구축하여 대영제국의 북부, 즉 스코틀랜드를 차단한 후 그 저지선 가까이 오는 모든 시민을 무차별 사살하는 식이다. 그리고서 산성 이쪽에 몸을 숨긴 채 저쪽을 위성으로 ‘채증’하며 시간을 버는 공권력.

문득 요새 대한민국 서울의 어떤 풍경들이 겹칠 수 있는데, 심지어는, 세월이 지난 후 저지선 이쪽의 영국에까지 바이러스가 발생하자 감염에 취약한 빈민가와 기득권의 지역을 분리하기 위해 진작에 파놓았던 운하를 터뜨릴 계획까지 세운다. 와우, 이 망할 놈의 기시감. (이런 류의 최근 개봉작 중 공동체를 돌보며 전진하는 영화는 <플래닛 테러> 정도가 유일한데 이는 70년대 B무비들에 대한 향수를 일부러 과하게 전시하면서 어떤 논리적인 인과관계에 개의치 않으려는 작가의 도드라진 선택. 최근의 경향에서는 논외로 칠 수 있겠다.)

#3. 이 중 가장 저예산으로 만들어졌을 <[●Rec]> 의 흥미로운 부분.

닫힌 공동체 내에서 한 명 두 명 감염되어가는 지옥도라는 설정은 제작 견적에 따른 영악한 선택이었겠지만, 그 와중에 현재 지구의 시민들이 공권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공포 “그들은 우리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못한다’가 아니라 ‘않는다’) 를 의식,무의식적으로 반영해냈다는 점.

사실 리얼리티 프로의 차용이라든지, 카메라의 1인칭 시점 등등은 참신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최근의 다른 저예산 또는 디지털 프로젝트들에서 미리 검증된 옵션들. <[●Rec]>는 이를 괜스런 야심의 확장 없이 알맞게 버무린 정도. 편집이나 여타 효과 없이 ‘카메라의 녹화 Rec 버튼’의 온-오프로만 상황을 전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음산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사운드 디자인이 촘촘히 개입한다거나 은근슬쩍 뒤 컷의 대사가 선행하는 (즉 편집의 개입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몽타쥬 등이 존재하는 등 안전한 대중영화의 관습을 따르는 형식적으로는 범작.

그러나 바이러스의 진원이 이 아파트로 규정된 순간 (‘규명된’ 것이 아니라 ‘규정된’ 것), 좁은 건물의 사방이 경찰에 의해 차단되고, 저격수에 의해 조준되며, 하얀 천에 의해 외부의 시선과 차단되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어떤 전율. 그 안의 구성원들은 아시아의 이민자 가정, 거동이 불편한 노인, 하급의 공무원, 병원체를 보유한 듯한 아이, 혼자 사는 중년의 비호감 남성.

겨우 출구를 찾아 이 저주받은 단지를 벗어나려는 이들에게는 건물 안 좀비들의 괴성보다 더 살벌한 경찰들의 스포트라이트와 경고방송이 가해진다. “당장 창문에서 물러들 나시오, 안 그러면 발포하겠소!” 당장 뒤로 물러서면 사람을 씹고 찢는 괴물들의 천지건만 이미 이 사회적 약자들을 시민사회의 구성원에서 제외키로 한 공권력 입장에선 내 알 바 아닌 상황.

등장인물 중 그나마 시민사회 또는 시장(市場)에서 발언권을 가진 이들이 있다면 우연찮게 소방관들을 따라 이 현장을 취재 방문한 방송국 리포터와 카메라맨. 허나 과거 순진한 시대의 플롯에서 적어도 저널리스트는 그 안위를 존중받던 것과 달리 이 21세기의 지옥도에서는 미디어 종사자들도 출구를 용납받지 못한다 (그 이전에 저널은 이미 저널 아닌 엔터테인먼트로서 권위를 상실한 상태이기도 했다).

사회를 야만의 투쟁 모드로 방임해두지 않기 위해, 즉 물리력과 경제력에 따라 먹고 먹히는 정글이 아닌 사안에 따라 공권력이 개입하여 조율하는 곳으로 유지키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줄 알았던 시민들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맹신 앞에서는 국가도 자신들을 투명인간 취급한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는 (또는 아직 논리적으로 파악하진 못했으되 어떤 불안한 징후를 느끼고 있는) 지금.

‘명박산성’이나 ‘대운하’가 연상되는 <둠스데이>의 직유법 보다도 더 섬뜩한 오버랩.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서라면 공권력이 일체의 소통을 거부할 수 있음이 밝혀지고 있는 이 무방비도시에서 그래도 아직 카메라를 들 수 있는 매체 종사자들은 어떤 미션에 복무해야할 것인가. 그저 녹화버튼만 누른다고 해결되진 않을 일. 적어도 서울의 그것이 영화<[●Rec]> 의 결말과는 다르기를.

2001년에 스물다섯이었던 성호. 그 해부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예 모르는 『산만한 제국』『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우익청년 윤성호』『이렇게는 계속 할 수 없어요』등등 극영화 같기도 하고 다큐 같기도 한, 실은 UCC에 가까운 - 중단편을 만들어왔다. 2007년『은하해방전선』이라는 장편영화를 만들며 나름 촉망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별로 안 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존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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