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보이스>는 최근 막을 내린 창작뮤지컬 <디셈버>와는 대조되는 뮤지컬이다. 개막 전 한껏 기대를 불러일으켰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희화하는 등 노래와 이야기의 궁합이 억지 춘향의 극치를 달린 주크박스 뮤지컬이었다.

<저지보이스>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미국의 원조 아이돌 그룹 ‘포시즌스’의 이야기가 얼마만큼 우리 정서에 맞을지가 의문이었다. 제아무리 내한공연이라 하더라도 우리 관객의 정서와 맞지 않으면 작년의 <아메리칸 이디엇>처럼 실패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웬걸, <저지보이스>는 <디셈버>처럼 어설프고 한숨 나오는 짜맞추기 주크박스 뮤지컬이 보고 배워야 할 만큼 탄탄한 이야기를 갖추고 있었다.

▲ 사진제공 마스트엔터테인먼트
그룹 이름 ‘포시즌스’는 뮤지컬의 전체적인 내용을 함축한다. ‘포시즌스’는 그룹 이름이면서 동시에 프로그램 북에 영문으로 나와 있는 것처럼 ‘사계’,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을 의미한다. 이를 뮤지컬의 전체적인 이야기에 대입해 보자. ‘봄’은 마음에 맞는 팀 멤버들이 그룹을 결성하는 시기다. ‘여름’은 히트곡 ‘쉐리’로 ‘포시즌스’라는 그룹 이름을 만천하에 알리는 데 성공하는 시기다.

‘가을’부터는 봄과 여름에 가려진 암울한 멤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봄과 여름에 활짝 핀 우정은 가을의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한다. 멤버들의 우정이 해체되기 시작하는 가을을 가정상담의 관점으로 볼 때 리더 토미가 영락없는 ‘공로자’다. 토미는 팀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팀의 발전을 위해 멤버들 몰래 사채를 끌어 썼다. 그리고 그 결과는 토미는 물론 팀원들이 똘똘 뭉쳐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빚이 된다.

통상적인 경우라면 토미는 팀원들에게 막대한 부담을 안겨준 민폐덩어리 리더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만일 토미가 빚을 끌어 쓰지 않았다면 60년대 포시즌스가 그토록 명성을 날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팀 몰래 사채를 끌어다 쓴 건 분명 토미가 잘못한 일이다. 하지만 토미가 그룹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악’으로 사채를 끌어다 사용했다면 토미는 공로자가 된다. 보컬 프랭키가 일에서는 보란 듯이 성공하지만 가정사에 있어서는 결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는 건 성공이라는 사다리가 가족과 함께 나아가지 못할 때 가정사에 어떤 비극이 들이닥치는가를 보여준다.

▲ 사진제공 마스트엔터테인먼트
<저지보이스>의 최고 미덕은 ‘겨울’에 있다. 겨울에는 생동하던 만물이 겨울잠을 자거나 움츠려 봄을 기다리는 시기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알겠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은 그룹 포시즌스의 해체를 뜻해야 한다. 하지만 뮤지컬의 이야기 속 겨울은 그룹의 해체가 다가 아니다. 헤어진 이들 멤버가 1990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다시 모여 무대를 가졌다는 건,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기다리는 겨울처럼 이들 네 명의 우정이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뮤지컬 <저지보이스>의 겨울은 그룹이 해체된 게 다가 아니라, 해체되었음에도 이들의 우정이 명예의 전당에서 재결합됐음에 의의가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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