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해임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명박 정권이 정연주 KBS 사장을 ‘무덤’ 속으로 보내려면 대통령의 해임 재가와 검찰의 신병처리까지 아직 몇 단계 절차가 남아 있지만, 그의 ‘부활’은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이명박 정권은 KBS를 장악하기 위해 법과 상식을 물리력과 궤변으로 궤멸시키는 전술로 상징적 진지를 거푸 ‘돌파’했다. 앞으로는 일사천리다. 대통령이 서명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법과 상식의 폐허 위에서 집행하는 검찰의 ‘무법’은 그 스스로 이미 ‘합법’이다. 허물어진 상징은 고지를 지키려는 쪽에도 더는 큰 의미가 없다. 상징의 완충장치가 무너졌으니, 남은 것은 백병전뿐이다.

▲ 정연주 KBS 사장이 지난 6일 오후 KBS 본관 회의실에서, 전날 감사원 특감 결과 발표을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미디어스
정 사장의 상징성은 개인 ‘정연주’의 아우라가 아니라 ‘KBS 사장’이 쥐고 있는 실체적 힘에 있었다. KBS 사장은 지상파 방송 정책은 물론, 지상파와 경쟁 관계인 통신 정책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우리나라 디지털 TV 전송방식이 유럽식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식으로 결정된 것도 다름 아닌 정연주 사장의 뜻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정 사장을 몰아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그저 논공행상이나 나팔수 심기 정도의 ‘소박한’ 목표 때문만은 아니다. 방송통신위원회·문화부와 함께 방송·통신 정책과 시장을 맘대로 주무르기 위한 마지막 삼각 꼭짓점을 완성하는 역사(役事)인 셈이다. 핵심은 역시 ‘자리’다.

시나리오대로 이뤄지는 캐스팅

그러나 ‘정연주 이후’는 곧바로 ‘누구’의 문제와 다시 대면하게 된다. 이명박 정권으로서는 KBS 사장 자리의 ‘탈환’ 못지않게, 앞으로 그 빈자리에 누구를 앉힐지가 결정적인 선택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방어하는 쪽도 마찬가지다. 차기 KBS 사장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을 살펴보면 이명박 정권이 한국사회 미디어 지형도를 어떻게 그려가려는지 미리 점칠 수 있다. 오명 전 동아일보 사장과 박병무 전 하나로텔레콤 사장이 유력한 KBS 사장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사정을 눈여겨봐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 두 사람이 급부상한 과정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캐스팅은 시나리오의 딸림변수다.

오명과 박병무 두 사람 이름을 들으면서 처음 드는 생각은 ‘이러려고 쌩쇼를 했나’이다. 두 사람이 이명박 정권 수립에 어떤 공로가 있었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영방송 사장 자리는 논공행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보여주려는 의도라고 풀이하려면 공적 영역을 사유화하는 데 너무나 노골적이었던 이명박 정권의 앞서 행태, 다시 말해 ‘고소영’ ‘강부자’ ‘에스라인’부터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이명박 정권의 노림수는 더 깊은 곳에 똬리 틀고 있다. 이미 공개된 플롯과 두 사람의 필모그래피를 견줘보면 감독 이명박의 캐스팅 이유가 비로소 짚인다.

▲ 오명(전 동아일보 사장, 좌측), 박병무(전 하나로텔레콤 사장)
오명. 체신부 장관, 건교부 장관,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이런 화려한 공무원 경력을 제치고, 그의 이름에서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동아일보사 사장과 회장이라는 언론계 경력이다. 그는 1996년부터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다, 2001년 회장에 올랐다. 그해 김병관 당시 명예회장이 탈세 혐의로 구속되면서 김 명예회장과 동반 사퇴하는 ‘비운’을 맞지만 않았어도, 그는 동아일보 경영권 세습의 ‘계투 요원’으로 회장 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렀을 것이다. 처음엔 전문 경영인으로 영입됐지만, 사장 때 한통프리텔 주식에 투자해 동아일보사에 거액의 시세차익을 안기면서 김 명예회장으로부터 ‘인간적인’ 신뢰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오명, 신문-방송 겸영 허용 포석…박병무, 공영방송 매각 노림수

이명박 정권이 오씨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만수 지식경제부 장관의 경우처럼 퇴역 배우 재활용 차원인가? (체신부라니, 언제적 이름인가. 참 오래된 배역이기는 하다.) 그렇지 않다면 역시 도드라지는 건 그의 동아일보 경력이다. 그가 KBS 사장이 된다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동관 청와대 대변인과 더불어 동아일보 출신 트로이카가 형성된다. 동아일보로서도 나름대로 꽃놀이패를 쥐는 것이지만, 오씨의 배역과 대사는 이명박 정권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 그는 신문-방송 겸영 허용을 위한 포석이다. 조·중·동에게 한 상 크게 차려주는 판이다.

박병무씨는 오명씨보다 더욱 뜻밖의 인물이다. 김앤장에서 변호사를 했고, 주로 투자금융기업에서 CEO를 맡았고, 올초 하나로텔레콤을 SKT에 파는 등 자신이 맡은 기업을 팔아치우는 데 탁월한 수완을 가진 M&A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도무지 지상파 방송사, 더욱이 공영방송사 사장 감으로의 이력은 눈꼽만큼도 없는 ‘사영(私營)’의 대가다. 그래서다. 그는 이명박 정권이 탐낼 수밖에 없는 필모그래피를 갖췄다.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모든 공적 영역을 비즈니스 프렌들리화하려는 감독으로서 이만큼 직설적인 캐스팅이 어디 있겠는가. 그가 KBS 사장이 된다면 곧바로 KBS2 매각의 배역이 주어질 것이다.

오명씨가 됐든 박병무씨가 됐든, 이명박 정권은 KBS를 벼리삼아 언론 정책의 시나리오를 완성하려는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다. 신문-방송 겸영 허용과 KBS2·MBC 민영화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지상파 시장의 포화 상태에서 조·중·동이 새 지상파 방송을 만들 수 있는 여지는 크지 않다. 동아일보(동아방송)와 중앙일보(동양방송)는 KBS2 민영화 과정에서 1980년 신군부의 방송 통폐합 이전의 지분을 적극 행사하려 할 것이고, KBS2 민영화는 곧바로 MBC 민영화로 이어질 것이며, 조선일보에게도 참여 공간이 크게 열릴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또 미디어 소유가 금지되는 대기업 기준을 3조원에서 10조원으로 완화해, 조·중·동이 대자본과 컨소시엄을 구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 ⓒ미디어스

이명박 정권 “생각대로 하면 되고”

시나리오의 절정은 한국방송광고공사의 해체다. KBS1이 국영방송화 되고 조·중·동이 지배하는 사영방송이 방송시장을 장악한 지형 위에서 한국방송광고공사의 광고대행 독점 체제를 해체하면 이명박 정권의 언론 정책은 사실상 완성된다. 시청률에 따라 방송광고 단가를 연동하면 한국사회 광고비의 대부분은 조·중·동이 주도하는 상업방송으로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 뻔하다. 가장 먼저 지역방송과 종교방송이 말라 죽겠지만, 머잖아 비판적 언론의 씨가 마를 수 있다. 광고주들이 단가가 뛰어오른 방송 광고 부문의 예산을 늘리려면 신문 광고 예산을 크게 줄일 것이고, 한겨레·경향신문부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곧 조·중·동 프렌들리이며, 비판의 실종이고, 민주주의의 사망이다. 그래서 오명·박병무의 급부상은 누구에겐 ‘생각밖’이지만, 이명박 정권에겐 ‘생각대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