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최소한의 양심도,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최소한의 절차도, 최소한의 도덕성도 사라지고 있다. 2MB 정권의 무자비한 삽질에 공동체가 그럭저럭 유지되기 위한 필수자산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라운드 제로’ 상태에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그제(7일) 난 술을 마셨다. KBS본관 부근의 술집이었다. 그 시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최상재 ‘선배’가 ‘달려’갔다. 방송장악·네티즌탄압저지범국민행동 성유보 상임위원장, 박성제 언론노조 MBC 본부위원장도 함께 끌려갔다. 난 그 자리에 일부러 가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한 선배의 말에도 난 술자리를 지켰다.

▲ 8일 낮 방송장악·네티즌탄압저지 범국민행동 주최로 KBS 이사회의 정연주 사장 해임 제청안 의결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윤희상
내가 일하고 있는 연구소는 시민단체 부설이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연구자이면서 시민단체 소속이라는 걸 잊은 적이 없다. 연구소 이사장은 연구원들을 ‘연구 활동가’(researching activist)로 성격을 규정하기도 했다. 이보단 ‘활동 연구자’(activistic researcher)가 더 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그만큼 운동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채찍질로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은 체 게바라가 혁명가로서가 아니라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으로 더 다가오는 시대다. 그런 시대에, 난 여전히 체 게바라를 혁명가로 바라보고, 혁명가 게바라의 실패에서 ‘혁명은 결코 수출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는 ‘꼰대’ 부류에 속한다. 방송 장악 분쇄 투쟁 역시 난 동일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혁명은 수출되지 않는다. 시민들과 시민단체가 아무리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지키자고 해도, KBS 안에서 그런 의지와 각오를 밝히는 사람들이 적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KBS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은 섭섭할 것이다. 어제 최상재 선배와 함께 달려간 KBS PD 현상윤 선배가 눈에 아른거리고, KBS 기자협회장 김현석 선배, KBS PD협회장 양승동 선배 등이 눈에 밟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KBS에 작으나마 연대의 손길을 내밀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한 ‘개인’에게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연대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동정(compassion)과 공감(sympathy)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 개똥철학은 아니고, 19세기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말이다.

▲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을 표방한 KBS 노조의 펼침막. 그러나 노조 관계자들은 민주광장 집회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윤희상
난 지금의 KBS에 동정과 공감을 전혀 할 수 없다. 본관 안에 수백명의 경찰이 들어와도, 촛불이 짓밟혀도 코빼기라도 비치는 구성원들이 수십 명도 안 되는 저런 조직에 아무런 동정과 공감을 느낄 수 없다. 시민단체가 ‘조직’ 차원의 사회적 연대를 하더라도, 이런 동정과 공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연대는 약할 수밖에 없다.

KBS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선·후배들은 ‘영국 BBC 쪽으로 좀 더 전진할 것이냐, 일본 NHK 쪽으로 좀 더 후퇴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KBS가 서 있다고 말한다. 일본 사회당의 몰락과 함께, 저널리즘을 거세당한 NHK가 돼서는 안 된다면서 우려하면서 말이다. 난 좀 더 심하게 표현하고 싶다. 지금 KBS는 사회적 흉기(凶器)가 될 것인가, 사회적 공기(公器)로 남을 것인가 역사적 갈림길에 서 있다고 말이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KBS 구성원들이 사회적 흉기 쪽을 선택하고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이게 과연 바뀔까? 나 하나 촛불에 더 보태면 어떨까? 나도 ‘달려가면’ 조금이라도 상황이 나아질까? 이런 의지의 낙관을 하고 싶은 심정 굴뚝같다. 연구소 소장과 때가 되면 기꺼이 ‘달려가자’고 약속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동정과 공감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혁명은 수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겐 동정과 공감의 기제를 작동시킬 KBS 내부 구성원들의 ‘신호’가 절실하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